'청포도다방' 운영…포항 근대 문화예술사 태동 이끌어

박영달 40대 시절.
박영달 40대 시절.

1938년 순전히 개인의 지적 호기심으로 펼쳐온 활동들이 우리 지역 문화예술의 풍토를 바꾸어 놓은 젊은이가 등장했다.

바로 ‘청포도다방’의 대표인 사진가 박영달이다. 박영달은 어릴 적부터 혼자서 생을 헤쳐 나아가야 하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본인의 운명을 개척해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우리 지역 최초 종합문화공간인 ‘청포도다방’을 오픈해 3인의 문화운동가(한흑구, 이명석, 김대정)와 함께 포항근대문화예술사에 중요한 전환점(포항문화원, 포항예총 창립)을 마련하였고 포항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그리고 뒤늦은 나이에 사진예술계에 입문해 한국 사진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업적들은 사후 32년간 긴 어둠 속에 묻혀 있었고 ‘청포도다방’과 그에 대한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져 왔다. 여러 가지 사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박영달이 사후 아카이브 자료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특별한 인맥, 학연도 없이 독학으로 이룬 예술적 성과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게 하였고, 넉넉하지 못한 생활인으로 살아야 하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히어, 그의 흔적들은 사후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2016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추당 박영달-사진예술과 휴머니즘’전을 개최하기 11개월 전쯤 꿈을 꾸었다. 내용은 경사가 심한 넓은 도로에서 주차장을 연상할 정도로 자동차가 밀려 꼼짝달싹도 못 한 상황이었다. 한참 후 겨우 차를 움직여 출발할 시점에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나타나 부딪히게 되었다. 너무 당황해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넘어진 오토바이에 웬 노인이 크게 클로즈업되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꿈이었다. 이상한 꿈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보내다가, 어느 날 박영달 인물 프로필 사진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사진은 꿈속의 노인 바로 박영달이었다는 것에 놀라웠다. 그는 오토바이 사고로 신경성 고혈압을 앓다가 타계했는데, 아마도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나와의 만남을 위한 예시의 꿈이 아니었을까?
 

박영달 ‘길동무’.

박영달은 1913년 대구에서 큰 금융업(증권)을 하는 가계(家計)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박영달이 13세 되던 해 부친께서 대동아 전쟁 때 대규모 사업투자를 벌였으나, 여의치 않아 집안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졌고 부친은 사망하였다. 졸지에 허드렛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 가는 고아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다. 친구들은 중등학교를 다니지만, 본인은 갈 수 없어 지식 습득에 대한 집착과 공부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친구들이 학교에서 그날에 배운 학습 내용이 적힌 공책을 빌려 그대로 베껴 기록하며 배움에 대한 열망을 해소해 나갔다. 이러한 지식의 습득은 더욱 목마르게 해 여건과 기회가 되면 닥치는 대로 독서를 하였다. 이후 그의 생은 독서가 생계를 이어주는 역할과 함께 오늘날의 박영달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박영달은 소년 시절부터 소리 예술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면서 바이올린을 독학으로 깨우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심취도 대단하였다.

젊은 시절 박영달은 선반 공장원, 철도원, 식당지배인 등 만주지역을 비롯해 전국으로 다니며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이러한 힘든 직업 세계를 전전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지식층들이 가지는 기자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 의외의 일이다. 이러한 점은 박영달이 왕성한 독서가로서 빛나는 지식과 성실함이 작용 되었다. 힘든 직업 세계에서 생활하다 보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종종 발생한다. 그때마다 박영달이 해결하는 역할을 도맡아 하였다 한다. 일례로 선반 공장원으로 일을 할 때 기계가 자주 고장이 나서, 아무도 해결을 하지 못했는데 박영달이 거기에 관한 문제점을 밤낮으로 꼼꼼하게 책을 읽고 설계도를 분석해 큰 도움을 주었다 한다. 이러한 인품이 알려지면서 지식인들이 기자직업을 추천해 1938년 그의 나이 28세 때 포항에서 기자(대구일보)직업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기자시절 일본에서의 박영달(뒷줄 왼쪽 세번째 박영달)

포항에서 7년간의 기자 생활은 우리 지역 구석구석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애착을 가지게 되어, 포항에 정착하게 된다. 박영달은 아무리 생계가 힘들더라도 최신 기계나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 반드시 손에 놓고 접해 보아야 하는 성품이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잡화 물건을 취급하는 프린트 가게를 했는데, 대구에 물건 하러 갔다가 마음에 드는 바이올린을 발견하자 준비 해 온 큰돈으로 몽땅 바이올린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성품은 가족들에게 생활의 곤궁함을 안겨 주었고, 여러 가지 생업(잡화상점, 프린트사, 버스매표소, 청포도 다방, 사진점, 꽃집)의 변화를 시도하는 삶을 살아왔다.

대구 근대사진가 구왕삼과 함께

박영달은 6·25 전쟁으로 문화운동가로서 전환을 맞이했다. 6·25 전쟁으로 아끼던 바이올린을 잃어버린 후 매우 상심하던 차에 박영달은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1952년 클래식 음악 공간인 ‘청포도다방’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 지역 입장으로선 근대 문화예술사에 큰 사건이다. 왜냐하면 우리 지역 최초 문화예술사의 모태 공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옆집에 서울에서 피난 온 사진가 박원식의 D.P점에 자주 놀러 간 것이 그가 사진예술가로서 우뚝 서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이때 박영달 나이가 마흔두 살이었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은 박영달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폭 넓은 예술학을 바탕으로 사진 세계를 다져 나가는데 심혈을 기울여 무명의 사진가 박영달이 수도권의 사진예술계에서 관심을 불러 모았다. 또한 1957년, 1961년 2회의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 개인전을 갖는 일이 드문 시기에 많은 화젯거리도 낳았다.

박영달 작 ‘풍선’.

그의 대표적인 ‘풍선’이라는 작품은 1958년 일본의 아사히 국제사진 살롱에서 입상한 작품으로써, 시간적인 요소보다 공간적인 요소를 색다르게 강조해 한국사진예술사에 신선함으로 주목받았다.
 

박영달

“앞으로 사진이 어느 방면이든지 안 들어가는 데가 없습니다. 과학이라든지, 우주든지, 어디든지 사진이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사진이 렌즈라든지 기계가 상당히 발전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피해서 회화가 달아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진도 앞으로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지리라 보고 있습니다”라고 1970년대 라디오 인터뷰한 내용에서 박영달이 사진가로서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보는 안목 또한 참으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고아, 6·25 전쟁 등 극한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개인의 지적 호기심으로 우리 지역 문화예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박영달은 위대한 개척자이다. 현재, 코로나 사태로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박영달의 정신을 어느 시점보다 크게 본받아야 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문화예술은 삶 속에서, 그리고 고통 속에서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는 법이니까(?).

박경숙 큐레이터·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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