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980년대 영국의 정치, 사회 및 경제 지형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의 몰락은 1990년 11월 13일 영국 하원에 울려 퍼진 한 전직 각료의 ‘사퇴의 변(辯)’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79년 대처 취임 때부터 재무장관, 외무장관, 부총리 등을 역임하는 등 한때 대처와 가장 가까운 ‘보수 혁명’의 동지로 손꼽혔던 제프리 하우(Geoffrey Howe)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독선적으로 변하는 대처의 리더십 스타일과 강해져만 가는 대처의 반(反)유럽 정서를 견디지 못하고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의회의 전통대로 총리가 자리한 의회에서 사임연설을 발표할 기회를 얻은 하우는 대처를 향한 강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유럽 국가들과의 협상을 크리켓(cricket) 시합에 비유한 하우는 ‘시합에 나가서 공을 치려고 하는데 팀 주장(대처)이 배트를 미리 다 부러뜨려 놓는다’라고 하소연하며, ‘나는 오랫동안 국가를 위해서 과연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였으며, 다른 이들 또한 이에 대해 고민할 때가 되었다’라고 설파함으로써 보수당 중진들이 당권을 두고 대처에게 도전할 것을 종용하였다. 가장 오래된 동지의 손에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 대처는 정치적으로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하우의 연설이 있은 지 9일 후에 당수직을 사임하였다.

요즘 언론에는 소위 ‘집 나간 며느리들의 복수’에 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중국에서 삼성전자의 사업을 총괄하던 사장 출신 인사가 경쟁업체인 중국 반도체기업에 영입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더니, 트럼프 정권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John Bolton)의 회고록이라는 메가톤급 핵폭탄이 떨어지면서 미국 정계는 물론이거니와 청와대와 여의도에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모든 회고록이 그렇듯이 볼턴의 회고록 또한 자신의 행동 또는 무기력함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정적들을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만큼, 이를 위해 회고록의 내용이 자기 편의적으로 과장되고 편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과대망상적 리더십, 그리고 한국 정부의 ‘보여주기’식 외교에 대한 집착 등으로 말미한 한미관계의 처참한 현주소를 까발려준다는 점에서 회고록의 학문적 가치가 높다는 점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필자와 같은 정치사학자에게 있어 이렇게 노골적으로 외교 기밀을 폭로한 최고위 인사의 정치 회고록은 그야말로 비밀 해제된 외교 문서보다 더욱 귀중한 ‘꿈의 사료(史料)’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꿈의 사료를 손에 넣은 기쁨은 잠시일 뿐,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곧 엄습해온다. 볼턴의 회고록 출간은 ‘자기 이익을 위해 한때 모시던 상관의 뒤통수를 이런 식으로 치는 것은 도리(道理)가 아니다’라는 프레임으로 주로 비판을 받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볼턴의 방식을 따라 ‘배신’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이제 조직에 머물다가 나가게 되는 사람들은 다 잠재적 폭로자들로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조직은 사람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 ‘실력이 있느냐’가 아닌 ‘믿을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고, 이는 곧 친인척, 같은 고향 사람, 같은 학교 선후배, 나에게 약점을 잡힌 인물 등의 기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우리 사회의 투명성 및 공정성 강화 노력에 큰 어려움을 가지고 올 것은 물론이거니와, 치열해져 가는 글로벌 환경에서 살아 남기 위해 필요한 경쟁력 확보 노력에도 상당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 100% 만족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없다. 20여 년이 넘는 외교 경험을 가진 볼턴의 입장에서 트럼프의 장사꾼식 국정운영이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겠는가. 하지만 그의 회고록 출간으로 인해 트럼프가 크게 깨닫는 바가 생겨 회심(回心)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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