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필자는 유럽의 작은 나라 벨기에에서 두 딸을 낳았다. 대부분의 의료가 무료에 가까운 나라였지만, 그중에서도 아기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는 특별했다. 임신부터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는 병원이 아닌 ‘어린이와 가족(Kind en Gezin)’이라는 독립 의료 기관에 가는데, 여기서는 오는 사람에게 어떤 정보도 묻지 않는다. 아기가 태어나면 별도의 등록 절차 없이 이름을 예방접종의 목록과 소개가 담긴 작은 책자에 적고, 접종과 진료 결과를 모두 이 책자에 기록하여 관리한다.

아프리카와 스페인 사이의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온 불법 체류자가 큰 사회 문제가 되던 상황에서 이 제도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불법 체류자는 사소한 교통 단속에 만 걸려도 검거와 추방으로 이어지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는데도 임산부와 아이들에 대해서는 내국인과 외국인에게 동일한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으니 말이다.

전에는 이 제도가 기독교의 이웃사랑 전통을 반영하거나 과거에 그 나라가 저지른 잔혹한 아프리카 식민 통치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만든 것인가보다 생각했다. 불법체류자는 체포해서 본국에 송환하더라도, 갓난아기의 건강만큼은 지켜주자는 인도주의 차원의 조치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20년 전의 그 경험을 다시 해석하게 된다. 불법체류자, 외국인, 미혼모의 아기도 안심하고 예방접종과 의료의 혜택을 받게 한 것은 단순히 그 아기와 가족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연대(連帶)의 장치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추방당할 것을 두려워하거나 미혼모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아기의 예방접종을 꺼리는 분위기가 생기면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질병과 그 질병 전파의 피해가 커질 수 있다. 역학조사를 하더라도 등록이 되지 않은 데다 늘 검거될 위험을 피해 다니는 이들을 찾아내기도 힘들 것이다. 차라리 묻지 않고 모두에게 예방접종을 해서 위험의 싹을 자르는 것이 그런 기회비용보다 훨씬 안전하고 저렴하다. 굳이 기존 병원과 분리된 기관을 세우고, 거기서 자기 국경 안에 있는 3살 이하 모든 아이들의 건강 문제를 책임지게 한 것은 이렇게 대단히 실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코로나19 감염이 확진된 외국인을 우리나라의 비용으로 치료하거나, 밀접 접촉자에게 무료 검사를 제공하고 감염자의 치료를 국가가 부담하는 경우를 세금 낭비라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큰 틀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제도야말로 전체를 지키는 가장 값싼 방법이다. 검사와 치료비용의 부담, 그 밖의 다른 이유들로 밀접접촉이나 감염 사실을 숨기는 이들이 생기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이렇게 보면 방역과 치료에 관련된 현재의 정책에서 더 나아가 감염으로 입원한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수입 손실까지 보존해 주는 적극적인 제도가 필요할지 모른다.

코로나19 사태는 남의 생존이 나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증거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현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관련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원리는 방역과 보건의 문제뿐 아니라 복지와 교육, 경제, 외교 정책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무상급식, 공교육 확대, 최저임금, 해외원조와 같은 제도들은 누군가에 대한 일방적 지원이 아니라 실리적인 의미의 연대이다. 반면 이런 노력과 제도를 ‘이유 없이 퍼주는 공짜 점심’이나 이상주의로 폄훼하는 것은 냉혹한 현실주의나 혼자 살겠다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생존을 거부하는 미련이다. 연대의 근본 원리는 결국 나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