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우리가 보통 “그 사람 의리(義理) 있다”라고 말할 때의 의리는 소절(小節)을 뜻할 때가 많습니다. 소절은 대의(大義)라고 보기에는 그 미치는 범위와 영향이 현격하게 작은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부모에 효도하거나 친구나 무리들과의 신의를 지키는 게 소절에 해당합니다. 민족이나 국가, 공동체를 향한 헌신이나 인간다운 삶을 선양(宣揚)하기 위한 희생은 물론 대의에 속하는 일입니다. 살다 보면 문득문득 의리 지킬 일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대의는커녕 소절도 지키기도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폭군 연산 때도 3정승, 6판서, 6승지(承旨)로 권세를 누리던 이들이 물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 12년(1506)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승지 윤장(尹璋)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로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챗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하여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라고 ‘연산군일기’가 기록하고 있듯이 제 살길 찾기에 바빴다. 연산군 말년의 영의정 유순(柳洵), 우의정 김수동(金壽童), 무령군 유자광(柳子光) 등은 되레 중종을 추대한 정국(靖國)공신에 책봉되었다. 한성판윤이었던 구수영(具壽泳)은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徽順公主)의 시아버지였고 “미녀를 사방으로 구해 바쳐” 연산군의 사랑을 받은 인물임에도 역시 공신이 되었다. 중종반정에 아무 공이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좌의정 신수근(愼守勤)만 연산군 부인의 오빠라는 이유로 처형당했을 뿐 모두 연산군을 버리고 중종을 떠받들었다. 기사본말체 역사서인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 연산조에만 유일하게 ‘절신(節臣)’ 항목을 두어 홍언충(洪彦忠)·유기창(兪起昌)·김숭조(金崇祖)·남세주(南世周) 등 중종 이후에도 벼슬을 거부한 네 사람을 적고 있는 이유는 이런 세태 때문일 것이다. [이덕일, 소절과 대의]

언젠가 서울의 한 유수한 대학에서 삼국사기의 ‘호동왕자 이야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편)를 논술문제로 낸 적이 있었습니다. 호동왕자가 낙랑 멸망의 공을 세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을 사관인 김부식이 소절과 대의를 들어 비판한 내용(중국의 순(舜)임금이 아버지가 휘두른 큰 매는 피해서 도망가고 작은 매만 맞았던 고사를 적음)을 제시하고 수험생 나름대로 사관의 논조를 재구성해 보라는 문제였습니다. 요점만 추려보자면, 호동이 죽을 때 남겼다는 말(“내가 만약 부왕에게 (큰)어머니의 악행-호동이 자신을 능욕했다는 참소-을 밝혀서 왕의 근심을 더하게 하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과 김부식이 덧붙인 말(“호동왕자의 행동은 결국 대무신왕으로 하여금 죄 없는 자식을 죽이게 한 결과가 되었으니 오히려 소절을 지키려다 대의를 그르치게 되었다”)을 현대적 관점(천년 이상 흐른 뒤의 청소년 시점)에서 재해석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국의 왕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는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여러 불가피한 상황이 존재했을 것이다.” “동아시아 지도가 크게 바뀌는 격변기에 권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암투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호동왕자의 죽음을 효와 불효의 문제로 초점화하는 것은 유학자 김부식의 사관에 의한 일종의 역사적 왜곡이라고도 볼 수 있다.” 등등 여러 가지 논점들이 나올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 신문지상에 공개한 최고의 답안은 “자기 아내(연인)에게는 자명고를 찢어 나라에 불충하고 부모에 불효하게 한 자가 자기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불효를 명분삼아 자살을 행한 것은 아주 그릇된 처사라 할 것이다.”였습니다. 대구 출신 한 여학생의 답안지였습니다. 논점은 완전히 문제의 취지를 벗어난 것이었지만 어쨌든 정곡을 찌른 말이라 상찬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출제자들이고 수험생입니다.

요즘의 시국이 그 옛날 ‘소절과 대의’ 문제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그릇된 소절에 내세우며 대의를 훼손하는 일을 자행하는 일부 비선출직 권력자들의 행태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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