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대구시내 중심가인 중앙로역 3번 출입구 옆에는 옛 본영당 서점의 건물이 있다. 이곳 건물 입구 윗부분에 대형타일 벽화가 기나긴 시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시민들은 알 길 없는 장식벽화로 여기고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것을 제작한 미술가는 다름 아닌 일산 서석규(一山 徐錫珪·1924~2007)화백 이다.

최근 서울에서 활동하는 열정 있는 미술학도의 관심으로 SNS상에 소개된 이 세라믹 타일작품은 제목이 ‘황소’라고 알려져 있다. 대구경북의 문화예술 행정가로 잘 알려진 서석규 화백은 1960년 대 당시에, 일찍이 서구 화가들에 의한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풍의 간접 영향을 이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1960년대 초 대구의 사립학교 벽면이나 장식의 멋을 조금 낸 회사 벽면에는 파울 클레(1879~1940)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풍과 호안 미로(1893~1983)의 추상표현과 입체파 등을 방작하고 변용시킨 벽화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아마 6·25를 겪은 후의 우리의 상황이 유럽의 1차 세계대전과 이어진 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추상회화나 앙포르멜 회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서석규 화백이 제작한 타일벽화

서석규 화백은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해성심상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미술학교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마친 후 고향인 대구에 정착하였다. 6·25전쟁 중에도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사교적 품성을 보여주었다. 1955년 대구미술가협회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대건중고등학교에 잠시 미술교사를 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대구미술연구소라는 화실을 운영하였다.

이후 현대미술학원으로 개칭하여 전문미술학원시대를 열었다. 현재의 봉산동 문화거리인 화랑골목 중간지점에 거주·살림집과 함께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이어 1973년에서 1986년까지 한국 미협 대구경북지부장과 한국예총 대구경북지부장을 역임하면서 대구의 문화계를 이끌었다.

작품세계는 일본 유학직후의 초기 아카데믹한 ‘자화상’ 인물묘사에서 기본기가 튼튼히 다져진 소묘력을 보여 주었다. 이어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한국전쟁의 기억을 그린 ‘귀로(1950)’, ‘귀가(1951)’, ‘판자촌(195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의 표현주의 풍 작품이 남아있다. 1960년 대부터는 추상화로 변화를 가졌고 과감한 생략과 과장된 표현으로 비구상 작업을 남겼다. 지금 중앙로의 타일 벽화는 이 당시 제작된 것으로 사료된다. 지금 보아도 1960년 대 비구상회화의 새로운 미감을 접하게 된다. 예술행정가 이전에 탁월한 조형능력을 소유한 미술가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필자의 기억을 되살리면 1964년 지금의 중앙파출소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길 언저리에 서석규 선생이 경영하신 화실에서 두어 달 그림지도를 받았다. 당시 미술대학생인 화실 조교들에 의해 지도를 받았지만 석고 데생하는 미대입시의 전문학원 이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된다. 1974년에는 경북도전이 처음 열릴 때 행사장에서 만났고, 대구미술협회 회원으로 가입한 1980년 대 이후에도 가끔 만나 뵐 수 있었다. 말년에는 범물동 아파트에서 거주하시다 향년 83세로 별세하셨다. 선생의 큰 뜻을 담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대구문화예술인장으로 장례식을 가지며 우리지역에 큰 족적을 남기신 뜻을 기렸다.

오늘날 DAC대구문화예술회관의 본관인 정면의 드넓은 전시 공간 배치는 실제로 서석규 화백의 미술 영역에 대한 집념과 이상을 보여준 결과물로 회자되고 있다. 몇 년 전인 2014년 선생의 족적을 기리는 대규모 회고전이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기회에 대구시청의 관계 부서나 중구청에서 이러한 의미 있는 1960년 대 타일벽화인 ‘황소’를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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