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트막한 성곽길 따라 정상 오르면 탁 트인 풍광이 시원

장기읍성을 둘러싸고있는 성곽과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때 이른 폭염(暴炎)과 장마가 시작된 6월 막바지에 시원한 산속 숲을 찾아 집을 나선다. 수년 전부터 자주 찾아가곤 했던 포항 남구 장기면에 있는 장기읍성과 연이은 동악산과 망해산을 오랜만에 만나러 갔다.

포항시내에서 40여 분 거리인 장기(長?)는 해안을 끼고 너른 들판과 야트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곳으로 역사적인 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고장으로 초여름에는 지역특산물인 산딸기가 유독 맛이 있고 달아 여행객의 발길을 잡는 곳이다. 장기읍성 아래 100년 역사를 지닌 장기교회 앞을 지나 읍성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성곽마루로 오른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더위를 날리며 성곽에 꽂아둔 ‘영(令)’자 깃발이 찾아온 객을 펄럭이며 맞이한다.

여러 차례 둘러 본 적이 있지만 다시 밟아도 새삼스럽다. 읍성의 둘레가 1,440m라고 소개하고 읍성 축조의 역사가 고려 현종2년(1,011년) 해안으로 들어오는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처음 만들어졌으며 조선조 세종21년(1439년)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돌로 다시 쌓아 지금의 형태인 석성(石城)이 되었다고 한다.

장기읍성 북문이 있는 성곽과 파란 하늘이 평화롭게 보인다.

읍성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가 장기의 진산인 동악산(252m)에서 동쪽해안으로 뻗은 산등성이 해발 약100m 높이의 야트막한 산 정상 평탄한 곳에 축조되어 산성(山城)으로써 군사기지 역할을 겸하는 독특한 읍성 형태를 지니고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옛 관아와 읍성내 건물과 성곽이 일제 강점기 때 파괴되어 현재는 향교(鄕校)만이 주민들에 의해 복원되었고 동헌(東軒) 등은 장기면사무소 마당에 새롭게 지어져 있어 읍성 안에서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최근 성벽보수와 북문 복원으로 읍성전체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고 성곽을 한 바퀴 둘러 볼 수 있어 다행이다. 12곳의 치성(雉城)과 옹성(甕城)등이 만들어진 마름모꼴의 산성에 3개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성(城)을 알리는 깃발과 함께 너른 성곽길(4~5m 정도)을 걸으며 수령이 수백 년 넘는 노거수(老巨樹) 그늘 아래 잠시 더위를 피하며 성곽 아래 마을을 내려다본다. 산딸기 수확이 막 끝나 인적이 드문 마을길에는 뙤약볕이 반짝이고 바람만 일렁이는 한가한 시골이 그려진다.

장기읍성 성곽마루 시원한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왼쪽 성곽을 따라 올라 조금을 가다 ‘동악산, 고석사’ 방향으로 내려 마을 끝자락을 등에 지고 산 쪽으로 길이 나 있다. 산딸기농장 옆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평평한 초지가 나오고 동악산과 고석사로 갈리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울창한 숲속으로 따가운 햇살을 피해 걸음을 옮긴다. 시원하다. 읍성에서 여기까지 그늘 없는 길을 땀 흘리며 걸었는데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숲 터널을 20분정도 걸어 산불감시소가 있는 동악산(東岳山·252.5m)정상에 닿았다. 사위가 탁 트인 정상에서의 조망이 일품이다. 눈 아래 동해바다와 장기고을이 훤히 보이고 멀리 경주 쪽 산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산바람에 마음을 달래고 다시 내려선다.

갈림길에서 고석사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망해산(望海山·202m) 넘어 있는 고석사(古石寺)까지는 4㎞가 남았다. 이어지는 숲 터널이 서늘할 정도로 땀을 식혀주어 발걸음이 가볍다. 한참을 시원함에 빠져 걷다 보면 탁자와 의자가 있는 쉼터가 나오고 ‘다산 정약용 길’이라는 앙증맞은 안내판이 산객을 반긴다. 길이가 1.0㎞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인 안내판에 꽃이 피어난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동해안 벽촌 장기(長?)가 숱한 정객과 학자들이 여러 연유로 이곳으로 유배(流配)되어 살았던 고장이라 당시 이름을 날리던 고관대작이나 학자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장기고을을 더욱 유명하게 하고 있다. 그 중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유배에 관한 역사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며 여기 그들의 이름을 딴 둘레길을 만들어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다산 정약용 길 안내판에 그려진 꽃그림이 앙증맞다.

‘다산 정약용 길’ 시작점에 정약용을 설명한 안내판이 걸려 있고 1801년 3월부터 9월까지 220일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농어민들의 애환과 생활에 관한 시와 책을 지었음을 알리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 다산은 이미 잘 알려진 인물로 경기도 광주 출생으로 74세의 일생(1762~1836)을 살면서 진보적 개혁자로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500여권의 많은 서책을 펴낸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자로도 크게 이름을 떨친 조선후기의 선지자(先知者)였다.

다산 정약용 길에 세워진 다산의 책이야기가 새롭다.

소나무와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등 숲 터널이 길게 이어지고 곳곳에 다산 정약용 문학작품의 소개와 유배 생활상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어 지루할 틈 없이 ‘다산 정약용 길’ 1㎞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이어지는 ‘우암 송시열 길’ 안내판이 나오고 다시 숲속을 시원스럽게 걷는다. 충북 옥천출신의 우암 송시열(1607~1689)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적어놓은 안내판에 힘차게 그려 놓은 난(蘭)이 국로거유(國老巨儒)라 불리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요, 노론정파의 영수였던 우암의 기개가 한 폭의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듯하다.

다산보다 120여 년 전에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우암은 1675년부터 4년간 이곳에서 지냈다. 1.3㎞의 산길에 우암 송시열과 얽힌 이야기가 곳곳에 꽃을 피우고 있어 거인의 발자취를 쉽게 접할 수 있다. 한여름의 숲 속에서 오랜 옛날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로 오르내리는 산길이 재미나다. ‘우암 송시열 길’ 막바지에 너른 임도가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망해산 직전까지 간다.

정상 바로 아래 있는 성황재는 그 옛날 지역 주민들이 서촌리에서 방산리로 넘나들던 고갯길로 앞을 지날 때마다 돌을 던지며 소원을 빌었던 흔적으로 돌무더기가 허물어져 있고 곧장 400여m를 오르면 해망산 정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육산에 어울리지 않는 이색적인 암릉이 나타난다. 기암절벽에 뾰족이 솟아 난 암릉에 올라 시원한 산바람을 맞는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숲속에 싸인 고석사 지붕이 빤히 보이고 멀리 장기면 소재지에서 방산리를 거쳐 포항 쪽으로 빠지는 신작로가 보인다. 망해산 정상에는 너른 평상이 두 개나 있어 앉아 쉬기 좋게 되어 있지만 그 닥 조망이 좋지는 못하다. ‘망해(望海)’라는 산 이름이 바다를 바라본다는 뜻인데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신창리 바다가 조금 보일 뿐 탁 트인 풍광을 기대할 수가 없다.

정상에서 고석사까지 길을 ‘희망의 길’이라 이름 붙은 낡은 안내판이 있을 뿐 다른 설명은 없다. 깎아지른 급경사를 내려서면 고석사에 닿는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 고석사에 얽힌 이야기로 서라벌 동쪽에서 홀연히 세 줄기의 빛이 솟구쳐 찾아간 혜능스님이 땅속에서 불쑥 큰 바위가 솟아나 서광을 비추고 있어 그곳에다 절을 짓고 그 바위에 미륵부처님을 새겨 모셨다 하여 ‘고석사(古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미륵전(彌勒殿)에는 바위에 새겨진 뷸상(佛像)을 모셔놓아 천년고찰의 기품이 서려 있다. 아담한 절집에 수국이 만발하여 더욱 신비스런 모습을 담고 있는 고석사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현존하는 유일한 석조여래의좌상(石造如來倚坐像: 의자에 앉은 듯 두 다리를 내려 뻗은 의좌형식)의 보기 드문 불상에 삼배(三拜)드리고 절집은 나선다.

장기에는 읍성둘레길과 동악산, 망해산 숲 속 산행과 함께 천년고찰 고석사의 그윽한 향기를 맡을 수 있어 발걸음과 마음이 즐겁고 또 다른 볼거리로 서촌에 있는 ‘장기유배문화체험장’이 재미를 더한다.

우암 송시열이 위리안치된 유배소 마당에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살아있다.

문화체험장에는 조선시대 유배문화에 대한 고찰이 잘 정리되어 있고 장기고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이 곳 장기에 조선조 태조(1392년)부터 고종(1895년)때 까지 500여 년 동안 117명이란 많은 정객과 문사들이 끊임없이 유배지로 드나들어 변방의 벽촌에 지나지 않던 이 고을을 충절(忠節)과 유향(儒鄕)의 고장으로 만들어 그 후예들 역시 훌륭한 인재로서 각계에 이름을 떨쳤음을 알게 한다. 특히 우암 송시열이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나무 울타리로 둘러쌈) 되었던 집 마당에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수 백 년이 흘러도 잎을 피우며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후손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어 새삼스럽다.

그 옛날 큰 고을 ‘장기현(長?縣)’의 영화를 가늠하며 군침을 돌게 하는 장기산딸기 맛을 보지 못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조금은 아쉽지만 ‘걸어서 자연 속으로’의 기행으로 유배문화 역사와 함께 6월의 숲 속 ‘힐링 엔 트레킹’ 여덟 번째를 마무리할 수 있어 기분 좋은 하루였다.

김유복 경북산악연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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