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3·1운동이 나라 안팎에서 거세게 퍼져 가던 1919년 4월, 유하현 삼원포에서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었다. 이는 부민단(扶民團) 중심으로 남만주 지역의 여러 조직을 묶어낸 것이다. 3·1운동의 열기와 함께 확장된 동포사회의 자치활동을 지도하고, 교육기관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 무장항쟁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을, 김동삼은 총무사장을, 김규식(金圭植)이 학무부장을 맡았다.

한족회는 출범 직후 곧바로 군사기관인 군정부 설치에 나섰다. 한족회에 상응하는 군정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동삼은 한족회의 결정에 따라 통하현 팔리초 깊숙이 자리했던 백서농장(白西農庄)을 철수시키고 군정부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삼원포로 이동하였다. 군정부는 군사정부를 표방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상하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한 도산 안창호는 7월에 이상룡에게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안창호는 “지금까지 외교(外交)와 내정(內政), 재무(財務)와 군사(軍事) 4가지 대단(大端)으로 주축을 삼았습니다. 지금부터 차례로 이에 대해 자세히 밝혀 올리오니 고치고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그간의 정무(政務) 진행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이듬해 1월에야 이상룡은 이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답장이 여러 달 지체된 것은 임시정부와 군정부 사이의 단합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석주유고』의「행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운형(呂運亨)을 파견하여 더불어 단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의논이 합치되지 못하고 분분하자, 공(이상룡)이 이르기를, “내 생각으로는 정부를 세운 것이 너무 빠르지만, 이미 세웠으니 한 민족에게 어찌 두 정부가 있을 수 있으리요. 또한 지금은 바야흐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시기이니, 마땅히 단합해야 하며, 권세 있는 자리를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하고, 드디어 정부를 상해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고쳐 군정서(軍政署)라 하고서 독판제(督辦制)를 채용하였다.

이글에서 이상룡이 임시정부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정부의 이름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바꾸고, 독판제로 개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제7호)에서도 확인된다. 즉 이상룡은 민주공화국을 지향한 대한민국 건설에 동참하면서 독립전쟁을 위한 독립군의 군사지도자로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것이다. 또한 안창호에게도 답신을 보내 기꺼이 군사적 기반이 필요했던 임시정부에 군사 협조를 약속하였다. 이진산과 윤기섭을 임시의정원에 파견하여, 1920년을 ‘전쟁선포의 해’로 이끌어 낸 것도 바로 그 일환이었다.

그 뒤 임시정부가 혼란에 휩싸이고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에도 서간도 지역 인사들은 창조파와 임시정부 사이에서 ‘개조’쪽에서 양자를 보합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석주 이상룡이 이승만 탄핵 이후 박은식에 이어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것은 단순한 명망 때문이 아니라 서간도 지역과의 이러한 관계 속에서 추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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