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 앙리2세가 사고사로 세상을 뜨자 39세의 카트린은 대비마마가 됐다. 전 왕의 부인이자 새 왕의 어머니로서 확고부동한 권한을 쥐게 됐다. 카트린은 조선 시대 궁궐의 여인처럼 정치에 개입하지만 당시 조정의 실권은 기즈가문이 쥐고 있었다. 아무리 법적인 지위를 확보한들 자기 세력이 없는 카트린은 큰소리를 칠 수 없었다.

신왕 프랑수아2세가 기즈공과 신하들의 의견을 쫓아 위그노라 불리는 신교를 탄압하자 카트린은 반대했다. 그녀 역시 가톨릭 명문가인 메디치가문의 딸이었지만 프랑스 국민이 종교문제로 두 동강이 나 피를 뿌려서는 안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패거리를 지어 다투는 것은 이념의 틀에 갇혀 서로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수아2세가 즉위 1년 만에 급사, 둘째 아들 샤를9세가 왕위에 오르자 신·구교 간의 갈등은 더욱 악화 됐다. 카트린은 종교 간의 관용을 통한 국민 화합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카트린은 샤를9세를 설득, 종교로 인한 상호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문제로 수감된 사람들을 모두 석방, 신교에도 집회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케 했다. 신·구교에 동일한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고 서로 이를 인정하는 관용과 화합의 초석을 구축했다.

카트린은 두 종파 간의 화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상대 종교에 대한 비방을 중지시키고 전국교회협의회를 개최했다. 이른바 ‘종교국회’를 소집한 것이다. 종교나 가문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프랑스 땅에서 추방하거나 멸절시킬 수 없으니 함께 살 지혜를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합의는 쉽지 않았으며 협의회는 결렬됐다.

“평화는 장마철 갠 날처럼 적었다”고 역사가들은 평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양측의 관용을 호소해 온 카트린은 화합의 일환으로 신교도 지도자와 구교도인 자신의 딸을 결혼시켰다. 카트린의 화합 노력으로 16세기와 17세기 종교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에서 종교재판소와 마녀사냥이 없었던 유일한 나라는 프랑스 뿐이었다. 카트린은 화합과 관용을 실천, 나라의 두 동강이를 막은 여성 지도자였다. 검찰을 두 동강이로 양분시키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카트린의 화합 정신을 본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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