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지우개는 고장 난 시간
저 단추는 자물통의 비밀번호
저 무늬는 빗소리
저 율동은 언덕을 오르는 당나귀
저 주름은 음모가 많은 가방
저 배경은 버려진 우물
저 뒷모습은 봄날의 의자
저 향기는 눈구멍만 뚫린 복면


<감상> 지나간 시간은 지우개로 지울 수 없고, 너와 나 사이에 단추를 풀어본 적 없고, 빗소리마저 내 마음 속 무늬로 새겨지고, 너만 모르고 당나귀처럼 나만 힘들게 오르는 율동이고, 온갖 상상과 음모로 가득하여 너의 옷에 주름이 생기고, 그리기만 했던 배경들은 더 이상 비춰지지 않는 우물로 남아 있고, 너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봄날의 의자처럼 한 번도 같이 앉아 본 적 없고, 풍기는 향기만을 맡다가 끝내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돌아선 너, 원피스 차림의 너. (시인 손창기)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