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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자식사랑만 변함없는 대한민국의 ‘뉴 노멀’
[아침광장] 자식사랑만 변함없는 대한민국의 ‘뉴 노멀’
  •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20년 07월 15일 15시 4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7월 16일 목요일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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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485년 8월, 조카인 영국 국왕 에드워드 5세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영국판 수양대군’ 리처드 3세는 30여 년 간 이어진 ‘장미 전쟁’의 피날레인 보스필드 필드(Bosworth Field)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적장(敵將)인 헨리 튜더(Henry Tudor)를 물리치기 위해 리처드가 가장 필요로 했던 부하는 튜더 가문의 인척이자 북서 잉글랜드 지역의 거물이었던 토마스 스탠리(Thomas Stanley) 남작이었다. 잉글랜드의 대원수(大元帥·Lord High Constable)라는 막강한 지위를 가진 스탠리의 배신을 우려한 리처드는 스탠리의 맏아들인 조지(George)를 인질로 삼아 스탠리의 돌발 행동을 막고자 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고 리처드의 우려대로 스탠리가 군을 보내 왕을 돕기를 거부하자, 리처드는 아들을 참수(斬首)하겠다고 스탠리를 협박하였다. 그러나 스탠리는 ‘폐하, 저는 걔 말고도 아들들 많아요’라고 대답함으로써 튜더 가문을 위해 싸울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 배신으로 인해 절대적인 열세(劣勢)에 빠지게 된 리처드는 결국 전사하였고, 헨리 튜더가 국왕 헨리 7세로 등극하면서 튜더 왕조가 개창하였다.

요즘 세계가 ‘뉴 노멀(New Normal)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새로운 일상’을 말할 때 주로 쓰이는 개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의 ‘뉴 노멀 시대’는 ‘포스트코로나 사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한 법무부 장관의 임명을 계기로 지금의 한국 사회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도통 알 수가 없는 윤리적 공백 사태에 빠지게 되었다. ‘조국 사태’를 통해 양심의 족쇄를 훌훌 벗어버릴 수 있게 된 정치인들은 이제 진영의 안위를 위해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여당 견제를 위해 야당이 법사위원장직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가 하루아침에 국회의 정상운영을 방해하는 적폐로 낙인찍혔고, 강남 집값을 잡는 것을 최우선적 국정 목표로 삼은 현 정부의 핵심인사들이 강남아파트를 사수하고 있다. 독재 정권에 항거하였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중국의 홍콩보안법 시행이라는 민주주의 파괴행위에 대해 눈과 귀를 닫았고, 오랫동안 우리의 롤모델로 존경받아온 사회 리더들의 파렴치한 민낯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제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 혼란스럽고 착잡하기만 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뒤집히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절대불변의 진리가 있으니, 이는 바로 한국 부모들의 ‘끔찍할 정도로 끔찍한’ 자식 사랑이다. 아무리 모순적인 정치 상황이라도 온갖 궤변과 권모술수로 덮어버릴 수 있는 ‘내로남불’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조국, 세월호, 인국공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식이 걸린 문제가 대두되는 순간 궤변과 권모술수가 통하기 어려운 곳이 한국 사회이다. 이에 자식의 문제만큼은 되도록 정쟁거리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정계 내의 공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놓고 뻔뻔한 상대에게 정공법(正攻法)이 먹히지 않을 경우 국민적 공분의 극대화를 꾀할 수 있는 자식 문제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사례는 더욱 빈번해지고 집요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한국 정치의 모습인가.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소신과 원칙을 부정해서라도 정치적 기회만 잡으면 그만이라고, 원하는 결과만 손에 넣으면 된다고 여기는 위정자들의 비겁하고 치졸한 행보는 결국 토마스 스탠리와 같이 자식을 정치적으로 희생시킬 각오 없이는 정치를 할 수 없는, ‘비정한 부모’가 아니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될 수 없는 시대를 불러올 것이다. 우리의 대표들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앞으로 ‘비정한 부모’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장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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