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2010년 7월에 서울 안국동네거리에 위치한 옥션 단에서 경매가 있었다. 집으로 경매책자가 배달 되었다. 펼쳐본 도록에는 깜짝 놀랄만한 전각인보가 소개되어 관심이 갔다. 그것은 대구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정(1897~1947)장군이 중국에서 독립투쟁을 할 당시에 제작한 ‘청금산방인원 聽琴山房印苑’이었다. 이상정의 인보책자는 총 198엽, 239방의 인장이 찍혀 있으며 1936년 중추절에 중국 남경에서 쓴 자서, 대서, 청남우지, 이상화의 친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저항 시인 이상화가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나 국내로 가져온 것으로 생각되었다. 독립운동가의 예술혼과 한국근대전각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자료였다. 후에 들으니 대구의 수장가가 경매에서 낙찰하였다고 하였다. 

 청남 이상정은 대구가 낳은 엘리트 우국지사로 대구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백부 이일우가 세운 서문로 우현서루에서 배움을 시작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죠중학교 육군 유년학부를 졸업하고 도쿄 미술전문학교와 고쿠가쿠인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마쳤다고 전한다. 1917년 귀국하여 계성학교와 신명학교에서 미술과목인 도화를 지도하였다. 1920년 초에는 정루 오산학교와 평양의 광성고보에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1923년 개최된 대구미술전람회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에 "서양화부에는 이상정 군의 지나사원 외 13점…등 대구에 이만한 미술가가 있었는가를 의심할 만큼 되었고"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상정장군이 1936년 중국에서 제작한 청금산방인원 의 전각인보

이상정은 목우 백기만이 저술한 ‘중국유기’라는 청구출판사의 1950년 발행 책자에 1921년에 서양화 개인전을 개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장소와 날짜가 불명확하여 추가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1923년에 이여성, 황윤수, 박명조와 함께 ‘벽동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미술활동을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재 이상정의 수채화나 유화작품이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기록을 통해서만 최초의 전시회와 작품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금에 자신의 인보와 자서를 통하여 그의 예술에 관한 흔적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으로 사료된다.

 중국으로 간 그는 서북국민군 부대의 장교로서 장개석 군대와 통합된 후 국민군의 참모로서 항일전선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상해와 남경을 중심으로 내 몽골,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김구와 김규식 등 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윤봉길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1942년 중화군사령부의 육군 소장으로 난징전쟁과 항커우 전쟁에도 참전하였다. 그 후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함께 중국군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군의 북지나지역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다. 광복 후 1947년 10월, 대구에 계시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귀국하였으나 40여일 만에 뇌일혈로 별세하였다. 이상정 장군의 장례행렬 사진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큰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멀리 계산성당이 보이는 대로에 만장을 앞세운 많은 추모객들이 따르고 있다. 대구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정치와 문화예술의 거물이라는 것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카이젤 수염의 이상정 장군은 초창기 서양화의 주역 이였으며 수채화와 유화를 처음 선보이며 대구경북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필자는 요즘도 고물상이나 골동품 가게를 지날 때는, 이러한 위대한 인물들의 흔적이나 우리가 잃어버린 중요한 자료 및 미술품이 있는지 살펴보기도 한다.

 빠른 시간내에 대구 최초의 서양화 작품인 이상정의 수채화나 유화작품이 우리 앞에 나타나 대구경북의 미술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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