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천 최병국 고문헌연구소 경고재대표·언론인

장맛비가 내리는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6·25 전쟁영웅 고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시민분향소’ 앞에는 우산을 쓰고 추모 차례를 기다리는 수많은 시민이 조용히 차례를 기다렸다. 지난 10일부터 발인 날까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서울시가 마련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 분향소에도 박 전 시장을 추모하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계속됐다. 이 두 곳의 분향소를 찾은 시민 가운데 양쪽 분향소를 모두 찾은 시민은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두 분향소 주인공들의 죽음의 원인이 이 시대 사회적, 도덕적으로 국민들에게 공감대를 이루기에는 극과 극의 장벽을 쳤기 때문이다. 한쪽은 6·25 전쟁영웅으로 받들어지며 대한민국 참 군인의 표상으로 살다 천수(天壽)를 누린 역전의 용사다. 말년에 진보진영의 친일행각 주장으로 행적에 상처를 입었다. 다른 쪽은 한때 사회단체 소속 변호사로 활약하며 직장 내 성희롱이 명백한 범죄임을 최초로 밝혀낸 페미니스트 겸 인권 변호사로 활약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9년째 시정을 돌보다 부하 여직원과의 성 추문에 휩싸이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차기 대권을 준비해온 정치인이다.

두 주검에 대한 정부의 대우도 확연히 달랐다. 말년에 친일파로 내몰린 고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는 보훈처가 서울현충원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도록 했다. 반면에 추문에 휩싸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원순 전 시장의 장례식은 서울시가 주관이 되고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장례는 5일장의 ‘서울시장(葬)’으로 엄중하게 치렀다. 서울시는 서울시청 앞 광장과 사체가 안치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분향소를 차리는 등 최고의 예우를 했다. 민주당은 “임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쓴 추모현수막까지 서울 곳곳에 내걸었다. 그러나 박 전 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 장례식을 반대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 인원이 장례식 아침까지 55만 명을 넘기는 등 반발여론이 높게 나타났다. 정치권도 두 장례식을 두고도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통합당은 여권의 박 전 시장 조문 분위기와 백장군을 비교하며 “민주당 일각에서 대한민국의 영웅을 친일파로 매도해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있다”며 ‘백장군 홀대론’을 주장했다. 정의당은 “조선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세워진 일제의 간도특설부대에서 활약한 고인을 대전현충원 안장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냈다. 반면 여당인 민주당은 고 백 장군의 친일행적을 의식한 듯 어떤 공식 입장도 내어놓지 않았다. 여성단체 간에도 박 전 시장에 대해 이견이 확연하다. 한쪽은 박 시장의 공적을 추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른 쪽은 성추행 의혹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동안 여성 인권에 목소리를 높여 온 민주당 여성의원들이 이번 박시장 사안에 대해서는 성 추문에 대한 추궁보다는 ‘추모의 분위기’로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참여연대도 “고인은 다양한 시민운동을 개척한 분으로 우리는 고인과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겠다”고 추모했다. 친여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기자회견 한다더니 뚜렷한 증거가 없다”, “미투를 하려면 얼굴을 공개하라”는 등 피해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 글들도 올라왔다. 지방의 현직 여검사도 페이스북에 박 전 시장과 팔짱을 낀 자신의 사진을 올리고 “자수한다. 내가 추행했다. 여성이 추행했다고 주장하면 추행”이라고 썼다. 박 시장을 고소한 여비서를 ‘조롱’하는 듯한 표현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유력인사들의 박 시장에 대한 애도와 공덕 칭송도 고소장을 낸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면에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단체들은 지난 13일 피해자 보호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건은 그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끝까지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주말부터 지금까지 소셜미디어에 활발하게 공유된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한 문장을 소개한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가해였다.”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극단적 선택과 이후 피해자를 향해 쏟아지는 2차 가해가 이 문장과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네티즌들은 “진실이 규명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 죽음”, “어째서 죄책감은 피해자의 몫으로 남는가”라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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