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가면 나무에게 지은 죄
강에 가면 물고기에게 지은 죄
왜 당신들에게 지은 죄는 보이질 않는가
기소와 선고와 집행이 유예된 세월에 마디가 돋는다
다음엔 또 무엇이 찾아올까
죄가 더덕더덕한 상습범의 얼굴로
청주 고등법원 524호 중법정을 내려와 대전으로 간다
여름을 기다리는 길가 산들아,
올해는 다를 거라 큰소리치지 말자
아무렇게나 어깨를 부풀리지도 말자
미루고 미루어도 가을이 오고
굽은 가지와 흰 눈썹 그땐
내 죄목을 다른 줄기로 변론하리
― 그는 아무것도 음모하지 않았고
물살에 잠긴 억새가 잠시 지느러미처럼 흔들렸을 뿐

남은 죄가 밤하늘 별처럼 총총하다


<감상> 나무, 물고기에게만 죄를 지었겠는가. 공기를 혼탁하게 만든 죄, 음식을 버린 죄 등 수없이 많은 죄를 지어도 죄인 줄 모르고, 바이러스로 죄를 받고 있음에도 죄받는 줄 모른다. 인간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죄목들을 변론하기 위해 어깨를 부풀리고, 다른 줄기를 가져와 마구 흔들어댄다. 끝까지 죄를 거부하고 미루어도 계절이 찾아오듯 자신의 죄를 감출 수는 없다. 신에게 의지하여 죄를 씻으려 하지 말고, 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씻자. 씻지 못한 죄가 보름달처럼 환하다.(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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