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최고의 에로티즘은 예술 속의 에로티즘이라는 걸 <취화선>은 잘 보여줍니다. 노골적이고 질펀한 정사(情事) 장면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는데 영화는 에로티즘이 철철 넘칩니다. 그런 면에서 <취화선>과 <뜨거운 것이 좋아>는 정통파 작가주의 도색(桃色)영화입니다. 육체의 에로티즘을 추구하지만 맥락의 힘으로 장면 장면을 살려냅니다. 같은 에로티즘 주제라도 무협영화 <검우강호>는 좀 다릅니다. 본디 남녀 간 색정(色情)을 멀리하고 가족애를 중하게 여기는 전통이 무협극에는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검우강호>는 유난히 특별합니다. 불가(佛家)의 구원 메시지를 표나게 내세워 천상(天上)의 에로티즘을 펼칩니다. 악연을 지닌 두 남녀주인공이 안팎의 온갖 어려움을 희생과 헌신의 가족애로 극복하고 궁극의 사랑을 이룬다는 멜로적 구성을 지닌 영화입니다. 멋진 무협영화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화려한 액션, 연기력 있는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와 아우라가 앙상블을 이루어야 하는데 <검우강호>는 그 세 가지 요소들이 “500년이라도 기다려 사랑하는 이를 피안으로 건너게 하겠다.”라는 아난의 돌다리 고사(我願化身石橋 受五百年雨打...)를 내세운 불교적 주제와 보기 좋게 콜라보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방불패>와 <와호장룡>을 뛰어넘는 정통 무협극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검우강호>의 주인공은 세우(양자경)와 장인봉(정우성)입니다. 세우는 장인봉의 아버지를 죽인 흑석파의 살수(殺手)입니다.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인 이 두 사람은 그러나, 얼굴을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서로를 사랑하게 됩니다(한 사람은 복수를 위해, 한 사람은 회개의 의미로 얼굴을 바꿉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숨은 진짜 주인공은 전륜왕(왕학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현실감 있게 묘사되는 인물입니다. 흑석파의 우두머리인 그는 두 얼굴의 사나이입니다. 낮에는 말단 9품의 내시이지만 밤에는 무소불위의 최정예 암살집단을 이끄는 강호의 최강자입니다. 어려서 거세당한 채 궁에 들어온 전륜왕은 불철주야 무공을 연마해 절세의 고수가 되었지만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달마대사의 시신이 새로운 사지를 돋게 할 수도 있는 비법을 알게 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달마대사는 궁중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거세를 하였으나 궁에서 나온 후 다시 원상회복을 하였다고 전합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입니다. 온갖 악행을 저지릅니다.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화와 불행은 그의 ‘가족을 갖고 싶은 열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그는 ‘끝없는 희생과 헌신’이 진정한 줄기세포라는 것(육죽이 세우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을 모르고 함부로 나대다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전륜왕의 간절한 욕망은 자신의 애제자 세우에 의해 좌절됩니다. 세우는 첫사랑 육죽에게서 자신의 벽수검법(劈水劍法·물을 가르는 예리한 검법)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전해 듣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합니다. 전륜왕에게 의도적으로 자신의 칼을 빼앗깁니다. 스승은 자신을 배신한 제자에게 제대로 된 훈시를 내리기 위해서 세우의 칼로 보란 듯이 벽수검법을 시전(始展)합니다. 악의(惡意)는 언제나 악의로 되돌려 받는 법, 회심(回心)한 영리한 제자가 놓은 덫에 걸려든 전륜왕은 어이없게도 열한 군데나 세우의 단검(이 칼은 남편의 칼입니다)에 찔려서 쓰러집니다. 이승에서 모든 인간의 생사를 관할한다고 큰소리치던 전륜왕(轉輪王)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습니다. 자신의 생사 하나도 관할하지 못한 채 맥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사랑은 희생과 헌신이지 독점과 지배가 아닙니다. 자기와 자기의 가족을 위해서 남과 남의 가족을 해하는 자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전륜왕은 실패하고 세우는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희생과 헌신, 무한한 선의(善意)와 용서, 가족애, 그런 것들이 있어 우리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무협영화 <검우강호>는 보여줍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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