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9년 3·1운동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다. 특히 수많은 혁명가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북의 권오설·김단야·박열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 3·1운동의 후예(後裔)들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공간도 일본·중국·러시아 등 다양했다.

이즈음 만주로 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 대열에 경북 출신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이 있었다. 남자현의 본관은 영양이며, 조상들은 대대로 안동 일직(一直)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출생지를 안동으로 기록한 글도 더러 있다. 그러나 ‘좌해유고(左海遺稿)’에 수록된 아버지 남정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조부 남종대(南鍾岱·1799~1870) 때에 영양으로 옮겨왔다. 그 뒤 다시 안동으로 옮겨갔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사료(史料)가 현재로서는 없다.

영양에서 성장한 남자현은 19세 무렵 김영주(金永周·1871~1896)와 혼인하였다. 남편 김영주는 의성김씨 32세로, 안동군 일직면 귀미리에 정착한 매은(梅隱) 김안계(金安繼)의 후손이다. 김영주와 남자현 집안은 누대에 걸쳐 각별한 사이였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한 지 5년만인 1896년 7월 11일, 의병이 되었던 남편이 지금의 진보(眞寶) 일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했기 때문이다.

남편 김명주의 죽음은 남자현의 인생을 가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뒷날 만주 망명자들 사이에 회자되었던 남자현에 관한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때 그곳(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도 빛나는 남자현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여걸(女傑)이었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일찍이 그의 남편이 의병으로 죽자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고 어린 유복자를 시부모에게 맡기고 독립 전선에 뛰어들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민들레의 비상 - 여성한국광복군 지복영 회고록’, 2015)

1910년 8월 끝내 나라가 무너지자 경북에서는 만주로 떠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남자현의 시댁 친척들도 대거 만주로 떠났다. 남자현 또한 원수 일본과 한 하늘 아래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 놓인 현실은 열다섯 살 아들과 노모를 돌보는 일이었다. 남자현은 당장 떠날 수는 없었지만, 만주지역 독립운동과 끈을 놓지 않고 연계를 가졌다.

1915년, 남자현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시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시어머니의 죽음은 만주로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1917년 드디어 결심을 굳힌 남자현은 아들 김성삼을 보내, 먼저 만주의 상황을 살피고 오도록 했다. 이어 1919년 3·1운동 소식이 있자, 남자현은 아들 내외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남자현은 곧바로 만주로 망명했다. 일행은 우선 10촌 친척 되는 김귀주(金龜周)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뜻한 바가 있었기에 생계는 아들에게 맡기고, 곧바로 활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처음 몸을 담은 곳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이다. ‘만주를 울린 근대한국의 여걸’ 남자현의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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