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KTX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졌다
나는 방죽 길에 서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렸다

아파트 방죽 길을 걷다 벼가 시퍼런 여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갈 숲 사이로
음악 같은 들오리 한 쌍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잡목과
허공의 손을 잡고 헤엄치는 들오리 한 쌍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눈이 깊었다

70대 노부부 같은 황혼
들오리의 어깻죽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10량짜리 삶이 지나가는 소리가 벼 포기마다 싱싱했다

나는 잘못 산 시행착오 앞에서
고아처럼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먼 곳이 가까웠다

괴롭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구름 아래 시간들
들판의 먼 아지랑이 같은,
구름 아래 슬픈 음악 같은,


<감상> 오리와 거위는 짝을 맺으면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다닌다. 70대의 노부부 같은 오리처럼 정겹게 살 수 없을까. 생의 노년에서 바라본 풍경은 먼 곳이 가장 가깝다는 걸 느낀다. 사라졌으나 되돌아오고, 시퍼런 여름이었으나 하얀 겨울이었고, 괴롭기도 했으나 기쁜 적도 많았다. 어김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자연 속에서 상대성의 원리에 따라 느낀 것들이다. 내 마음이 슬프면 슬프게 보이고, 기쁘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뿐. 지난날을 성찰하고,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내일을 아름답게 맞이하면 그만이다. (시인 손창기)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