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에서도 도덕을 존앙하였거니와/ 나 역시 그대를 사모하였소/ 평생에 면모를 대한 일이 없거니/ 아쉬운 마음 더욱 더 간절하구려” 86세로 숨을 거둔 ‘백의정승’ 윤증을 애도한 숙종의 애도시(哀悼詩)다.

윤증은 조정에서 수없이 현직에 대한 직첩을 내렸지만 모두 거절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우의정 직첩을 받고 올린 사직상소만 18번이나 됐다. 그가 올린 사직상소는 수 백통이 넘어 조선조 500년 동안 가장 많이 사직상소를 썼다. 우의정 직첩을 받고도 입궐하지 않을 만큼 대궐 출입을 일절 하지 않아 임금도 윤증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벼슬을 내렸다.

그래서 숙종은 자신이 쓴 애도시에서 평생에 면모를 대한 일이 없다고 썼다. 임금이 신하의 얼굴도 모르고 대신에 임명한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도 희귀한 일이었다. 윤증이 생존하던 당시 사회에서 그가 차지했던 비중이 어떠했던가를 짐작게 한다. 정승의 직첩을 받기까지 한 번도 관복을 입어본 적이 없어 ‘백의정승’으로 불렸다.

그가 관직을 사양하고 조정에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정승의 녹봉이 다달이 지급됐다. 하지만 그는 녹봉을 받지 않았다. 한 번도 대궐에 가본 일이 없지만 사의가 수리되지 않아 녹봉이 그대로 지급됐던 것이다. “대궐에 들어가 업무를 이행한 일이 없다”면서 지급되는 녹봉을 고스란히 고을 현감에게 돌려 보냈다.

그가 죽고 난 뒤 이 사실이 관찰사의 장계로 임금에게 알려져 숙종은 그 녹봉을 자손들에게 돌려주라는 영을 내렸다. 자손들 역시 “선고(先考)가 사양하던 재물을 받을 수 없다”며 끝까지 사양했다. 그 조상에 그 자손들이었다.

집권세력 소론의 영수이면서도 한사코 벼슬길에 나가기를 마다한 것은 그의 쓰라린 인생행로가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어머니의 자결과 친족들의 잇단 순절로 어린 윤증에게 쓰디쓴 상처를 남겼다. 80이 넘는 평생을 살얼음 걷듯 조심조심 살아온 윤증은 표리부동과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피바람 부는 당쟁 속에 휘말려 드는 것을 철저히 경계했다. 그 덕분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 윤증의 처세는 표리부동 업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공직자의 비극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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