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사람은 별명 짓기를 즐기는 동물이다. 주로 외모나 성격 같은 특징을 바탕으로 남들이 지어 부른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들도 그 대상이 된다. 때론 조롱기 섞인 애칭으로 권위를 풍자해 공감을 자아낸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붉은 수염왕’으로 불렸고, 프랑스 절대 왕정의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 존칭됐다.

인도 영화 ‘세 얼간이’는 최고의 공과 대학 신입생 셋이 총장과 벌이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그곳 역시 교육의 문제점이 많은 듯하다. 마치 우리의 현실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별호가 여럿 등장한다. 밀리미터·소음기 등등. 총장은 학생들 사이에 ‘바이러스’로 통한다. 일등 지상주의자로서 열등생은 가차 없이 다루는 탓이다.

세계의 유명 도시들 또한 별칭을 가졌다. 뉴욕은 사과를 나타내는 빅애플이고 베이징은 자금성을 뜻하는 포비든 시티로 불리는 식이다. 그 도회지 특성을 한마디로 상징하는 키워드. 별명을 듣는 순간 뭔가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것을 찾고픈 욕망이 솟구친다.

지난해 늦가을 탐방한 태국 제2의 도시 치앙마이는 ‘북방의 장미’라 일컫는다. 한데 이상했다. 사시사철 후덥지근해 다양한 꽃들이 피긴 하나 장미완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책에도 일절 언급되지 않는다. ‘덥고 더욱 덥고 완전 더운 날씨만 있다’는 어느 작가의 말대로 통상은 어울리지 않는 은유이다. 물론 나무들 생육은 한국보다 6배가량 빠르다.

나는 여행을 앞두고 해당 지역 관련 서적을 반드시 읽는다. 그 역사와 문화를 이해함으로써 경비와 시간을 투자한 만큼 지식을 얻고자 애쓴다. 직접 확인한 사항은 후일 누군가에게 유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지에 가서 체험하고 관찰할 목록을 작성함은 당연지사. 북방의 장미로 칭하는 치앙마이엔 어떤 장미가 있을까도 그중의 하나였다. 결국 미션을 완수하진 못했으나, 어여쁜 꽃과 미인들 덕분에 얻은 별칭이란 선전 문구는 수긍했다.

사실 치앙마이 여성들 미모보다는 미소가 인상적이다. ‘북방의 장미’란 찬사도 그들의 웃음이 창조한 이미지가 아닐까. 실지로 서너 차례 그런 경험을 하였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성이 쳐다보면서 정겹게 웃는다. 왜 저러지, 마음에 든다는 신호인가 착각할 정도다. 그들은 ‘타이 스마일’로 그냥 의례적 표정일 뿐인데 일순간 여행자는 황홀하다.

경북의 동해안 중심인 포항의 시화는 장미다. 바다처럼 거칠고 강철처럼 차가운 심상을 순화하는 멋진 조합이라 여긴다. ‘천만송이 장미도시’를 지향하는 시정대로 도처에 꽃밭이 조성됐다. 자주 산책하는 철길숲 공원도 마찬가지다. 장미 정원엔 아카데미 수료생이 조성했다는 팻말을 세웠다. 근데 품종이 2만5천 종류나 되는 그녀들 이름표가 궁금하다. 주객전도랄까.

장미는 붉은빛 꽃잎이 화려한 반면 뿌리는 곰팡이에 취약한 화초다. 비유컨대 외모는 아름다우나 내면은 병들기 쉽다는 의미를 품었다. 화이부동. 장미를 좋아하되 성정을 닮지는 말자. 타인을 평가할 때 심층보다 겉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러하다.

클레오파트라는 서양을 대표하는 미인이라 여기나 실제론 추녀에 가까웠다고 평한다. 유년 시절부터 방대한 독서로 교양을 쌓았고 7개 외국어에 능통한 지성인. 당대의 영웅 카이사르와 뿌린 염문은 우연이 아니다. 여성의 매력은 외양도 중요하나 내적인 성숙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클레오파트라는 겉치레가 아니라 내실의 멋쟁이였다.

장미는 스펙트럼이 넓다. 빨강·노랑·분홍·하양 그리고 혼합색까지. 역시 심홍색 송이가 가장 장미다운 품격이다. 다른 색상은 염색이 잘못된 혹은 햇빛에 퇴색한 그런 느낌이다. 초봄 아파트 담장을 수놓던 덩굴장미부터 시작된 미녀들 향연도 어느덧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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