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빈곤의 절정에 선 삶의 민낯 목판화에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담히 눌러 담아

김우조 목판화가.

‘삶’에 대한 본질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우리 지역 죽도시장의 인상을 판화 작품으로 남긴 작가가 있다. 바로 목판화가 김우조이다.

죽도시장은 해방 후, 입에 풀칠하기 위해 나선 어머니들이 ‘자식에게만큼은 이 고생 물리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던 생활 터전이었다. 오늘날 죽도시장의 인상을 만들어낸 그때의 어머니들이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어 냈던 강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6·25 전쟁 이후 화가 서창환이 포항중학교에 미술교사로 10여 년간 재직하던 시절, 친분이 있었던 김우조를 불러 들여 포항중학교와 포항여중에서 3~5년간 미술교사로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경북 달성군이 고향인 김우조는 어릴 때부터 나무를 만지고 다듬는 일이 능숙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우리 지역 풍경을 참으로 좋아했다. 특히 죽도시장의 생동적인 모습에 반해 틈만 나면 죽도시장에 들러 막걸리 잔을 자주 기울였다. 김우조는 한국 근대기에 기라성 같은 화가가 많이 배출됐던 대구지역에서 유일하게 홀로 목판화 작업을 해 왔다. 1950년~1970년대에 대구·경북은 물론 한국 화단에서 조차도 목판 작업을 하는 작가는 몇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김우조의 목판화 작가로의 변신은 그의 존재감과 자기만의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김우조(60대)

김우조는 1941년 서진달(대구 출생)로부터 미술을 배운 후 제20회 선전에서 ‘책을 읽는 소년’이라는 수채화 작품으로 입선을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포항, 구미지역에서 미술 선생으로 직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기엔 유화와 수채화 위주의 작품 활동을 했으나 재료적인 해결을 위해 1950년 이후부터는 독학으로 판화작품 제작에 심취해 목판화를 고집했다. 김우조는 “돌이켜 보면 판화작업은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극복한 것은 스승인 팔만대장경이 있었고 조형의 기초를 가르쳐 주신 서진달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판화는 찍히는 맛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판화에 대한 철학을 고수했다. 젊은 시절 물감이 너무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물감을 아껴야 되는 심리로 인해 불타는 창작 열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목판화이었다. 굴러다니는 나무 판넬에 먹물, 종이만 있으면 최소한 재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무엇보다도 목판을 작업함에 있어 ‘신성한 노동력이 주는 쾌감’이 좋았다 했다. 그리고 해방과 6·25 전쟁의 주변 풍경들을 표현하는데 목판화가 가장 적합했고, 그 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르였다고 했다.



우리 지역에서 그가 알려지게 된 것은 2003년 포항대백갤러리에서 열렸던 초대전이다. 회화적이고 서정적인 작품들 중에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의 죽도시장을 배경으로 민중미술을 연상하는 듯한 3~4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김우조의 작품은 인물이나 골목 풍경 같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죽도시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빈곤의 절정에 선 사람들의 민낯을 그대로 표현했기에 독일의 케테 콜비츠처럼 어떤 특별한 예술관을 가지고 목판에 칼질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6·25 전쟁 이후 서민들의 삶의 풍경을 진솔하게 담았기 때문에 죽도시장의 인상이 민중미술의 판화로 느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김우조의 죽도시장의 판화는 ‘서정성과 인간적인 따뜻함’이 묻어 있다. 김우조는 춘궁기 시절의 죽도시장의 서민들의 생계를 이어가는 모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담하게 나무에 칼질을 했다. 모두가 배를 곯았던 시절에 진솔하게 표현한 일상들이 김우조에게는 오히려 정감이 가고 따뜻한 일면을 느끼게 해 목판화의 친근감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특색적이다.

대체로 회화 작품은 주제를 부각시키고, 그 외의 부산물들은 생략 처리하거나 단순 처리 하는 기법이 일반적인 특성인데, 죽도시장을 배경으로 하는 김우조의 판화에는 서민들의 주변 물건 하나하나에도 애정이 있는 시선들, 이를테면 죽도시장 칠성천 가장자리와 주택 뒷 난간에 얼기설기 나무로 엮은 다리 형태에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는 상인들의 이면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작품이 독특하다. 두부 공장임을 알리는 작은 간판, 이층 장독대, 석유 드럼통, 빨래줄 등 어두운 생활의 단면을 아기자기한 인간미를 단순한 면 처리와 군더더기 없는 시원한 칼 맛은 목판화의 진수를 보여 준다. “어려움을 겪고 통과한 사람만이 진짜 화가라고 인정해줘야 해요”라는 그의 말처럼.

남빈동어시장.포항시립미술관 소장.
죽도시장 칠성천.포항시립미술관 소장.

‘남빈동어시장’을 비롯한 ‘죽도시장’, ‘뒷골목 풍경’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징, 즉 구도상의 기법인 원근감을 무시한 채 서민들의 태도와 옷의 모양, 거주의 형태, 하나하나의 생선 모양 등을 모두 담아내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죽도시장의 전체적인 인상을 표현했다기 보다는, 죽도시장의 상인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유별하였다는 증거임을 알 수 있고, ‘오늘도 치열한 생존의 현장을 무사히 보내었구나!’ 라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삶과 노동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점이 그의 작품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비록, 하루하루가 힘들고 녹록치 않았던 주어진 삶이지만 ‘뒷골목 풍경’ 작품처럼 묵묵히 막걸리 한잔으로 피곤을 달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김우조의 판화에 대한 철학과 목판화에 대한 우수한 면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김우조가 죽도시장을 배경으로 남긴 작품으로 인해, 1950년대~70년대의 빈곤한 지역 미술사에 문화적 다양성을 얻을 수 있게 되어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지역 근대미술사에 조금은 풍성함을 갖추게 됐고, 목판화라는 장르를 통해 후세들에게 죽도시장의 인상을 알릴 수 있어, 우리 지역으로선 김우조의 작품들은 정말 소중하다.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기억, 과거의 회상을 알리기에는 오늘날 문화예술이 다원화와 다양성이 흐름의 추세에서 미술 작품이야말로 영원성을 갖는다. 그동안 죽도시장을 알릴 수 있는 많은 예술 작품이 있었지만, 유독 김우조 작품만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가 무얼까? 아마도 목판에 한칼 한칼 칼질을 할 때마다, 시장에 모여든 개개인의 사연들과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마음을 알기에, 김우조는 인간의 본성 즉, 진실하게 생존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서 숭고함의 본질을 느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박경숙 큐레이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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