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철 한동대 교수
손화철 한동대 교수

선거 후 좀 잠잠한가 했더니, 정쟁이 시작되자 어김없이 또 색깔론이다. 대통령이건 국회의원이건 상관이 없다. 마음에 안 들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여 때리고 죽이던 시절을 넘어선 지 3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민주국가를 이룬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그 다른 생각이 협상과 대립을 거쳐 모두 인정하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인정은 합의나 동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합의하지 않기로 한 합의마저 받아들이는 제도다.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나 정파가 권력을 잡으면 불만스럽지만, 다음에는 나와 내 정파에도 기회가 있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하고 다음 선거와 결정 단계를 기다린다. 이 모든 경우에 폭력이 배제된다.

색깔론이 민주주의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이유는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와 전쟁의 아픔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자’, ‘빨갱이’ 같은 말들은 그냥 쓸 수 있는 비난이 아니다. (이는 ‘친일파’도 마찬가지다.) 그 말들은 우리의 역사적 맥락에서 상대를 “죽여도 좋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깔고 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상대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 폭력만큼 심각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물론 이 모든 언사는 정치적 대립을 선명하게 하려는 수사(修辭)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도를 넘는 표현을 자제하지 않으면 결국 자가당착에 빠져 스스로의 언행을 설명하기 힘들게 된다. 국가정보원장에 임명된 박지원 전 의원에게 “적과 내통하는 자”라고 말한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적과 내통하는 자와 국회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의정활동을 같이 했다 말인가? 과거 그 사람에게 공천을 준 당이나 국회의원으로 뽑은 시민들, 나아가 그를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한 대통령 역시 적과 내통하는 자로 보는 것인가?

주호영 의원이 굳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진심이라기보다 그런 색깔론에 경도된 이들의 지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현 정부가 3대 세습과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북한 당국을 추종한다는 음모론을 믿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현 집권세력은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고 북한에 갖다 바칠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행정, 사법, 입법, 언론, 학계에 주사파가 대거 진출해 있으며, 모든 선거와 여론조사, 뉴스는 조작되어 대다수 건전한 국민이 속고 있고, 상황을 꿰뚫어 보는 건 눈 좋은 몇몇 극우 유튜버 뿐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색깔론에 기대는 것은 현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야당의 비판을 무화시키는 역효과만 일으킬 뿐이다.

정치적 반대와 토론은 민주주의의 증거이고 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판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입장과 주장은 검증에 열려 있어야 하고, 상식의 잣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황당한 음모론과 매몰된 자들과 그 색깔론에 편승한 정치인들의 과장된 언행은, 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민주국가의 자유를 구가하는 오늘의 현실과 도무지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모든 자유로운 활동에 잘도 참여하며 기득권을 주장하고 표현의 자유를 핑계 삼아 타인에 대한 혐오와 가짜뉴스마저 두려움 없이 퍼뜨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재를 경험하고 있다 하니 같은 사전을 쓰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색깔론, 진심으로 믿는 자는 멍청하고 작전으로 쓰는 자는 사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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