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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11. 천관사지(天官寺址)
[삼국유사 오디세이] 11. 천관사지(天官寺址)
  •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 승인 2020년 08월 05일 18시 0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8월 06일 목요일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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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삼국통일 대업'으로 피어나다
복원공사 중인 천관사지 삼층석탑 몸돌과 옥개석이 팔각형인 독특한 양식이다.

경주 탑리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다. 신라시대 전불칠처가람 중 하나인 담엄사가 있는 마을이라서 그렇다는 설과 천관사지와 인접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천관사지 발굴조사를 벌였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 마을이 탑리로 불리게 된 이유를 천관사지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을의 논과 밭의 보강석이 천관사지의 탑부재였음으로 탑리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탑리마을은 남동쪽으로는 신라시대 화백회의가 열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도당산과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남천 건너 김유신이 살던 집인 재매정지, 북동쪽으로 교촌마을, 반월성 등과 이웃해 있다. 서쪽에는 오릉이 있는 신라 유적의 ‘강남’이다. 이 탑리마을에 천관사지 삼층석탑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이 탑은 당초 지난해 완공계획이었으나 복원과정을 둘러싸고 학계와 경주시간 이견을 보여 준공이 늦어지고 있다.

천관사지와 천관사 삼층석탑.

천관사지는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 간 사랑에 관한 기록이다. 남자는 출세를 위해 사랑을 버렸고 버림받은 여인은 절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공한 남자는 훗날 죽은 여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여인의 이름을 따 절을 지었다. 이 신파 같은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남자 주인공이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金庾信·595~673)이기 때문이다.

경주 남천.왼쪽 숲 너머에 천관사가 있고 오른쪽 나무 너머에 재매정이 있다.

“김유신이 어렸을 적에 우연히 기생집에서 잤다. 그의 어머니가 나무랐다. ‘나는 이미 늙었다. 밤이나 낮이나 네가 성장하여 공을 세워 임금과 부모를 명예롭게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네가 지금 천한 아이들과 어울려 기방이나 술집에서 장난치며 논다는 말이냐.’ 하고 흐느끼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유신이 다시는 그 문 앞을 지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어느 날 유신이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말이 길을 잘못 들어 기녀의 집에 이르렀다. 기녀가 한편으로 기뻐하고 한편으로 원망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나와 그를 맞았다. 유신이 타고 온 말을 베어 죽인 뒤 안장을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왔다. 기녀가 원망하는 노래를 지었는데, 후세에 전한다. 절은 곧 그녀의 집이며, 천관은 그녀의 이름이다.”

김유신장군의 집터인 재매정택지.

고려 후기의 문신 이인로(李仁老·1152~ 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전해오는 이야기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천관녀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삼국유사』는 ‘원성대왕’ 조에 원성왕의 왕위 계승 스토리에 ‘천관사’를 슬쩍 흘려놓음으로써 천관녀에 대한 추적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사기’와 ‘유사’는 삼국통일의 영웅을 한미한 기생과의 스캔들로 폄훼하는 것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김부식은 신라귀족 출신 집안의 유학자였고 일연은 고려의 국사까지 지낸 고려시대의 스타급 큰 스님이었다. 반면 김유신 스캔들을 까발린 이인로는 시문이 뛰어난 문학가였다. 남녀 간의 스캔들은 아무래도 문학가의 몫으로 적당한 소재이다.

김유신은 사랑과 출세의 갈림길에서 거침없이 출세의 길을 택했다. 그가 사랑을 버리고 ‘곧은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가계가 겪고 있는 절박성에서 찾을 수 있다. 김유신 집안은 잘 알려진 대로 가야계 출신 진골이다. 그의 증조부는 금관가야 10대 구혜왕(일명 구형왕)인데 532년(법흥왕 19)에 나라를 신라에 들어 바쳤다. 그 대가로 상등이라는 벼슬을 받고 진골에 편입됐다. 진골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굴러온 돌’에 불과했다. 신라의 주류들은 아무도 그들을 ‘인싸’에 끼워주지 않았다.

할아버지 김무력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이고 한강유역에서의 신라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진흥왕은 여러 전투에 그를 투입했고 그는 그때마다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주류세력으로부터 극심한 견제를 받고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아버지 김서현도 주류 귀족사회에서 크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만명부인을 마음에 품다가 ‘야합’했다.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이다. 신라최고의 엘리트 가문의 딸이었다. ‘야합’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모욕적 언사이다. 『삼국사기』는 이들의 인연을 야합이라고 기록했다. 짐승들이 들에서 벌이는 섹스다. 서현이 만노군태수로 발령이 나자 만명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 숙흘종이 이들의 사이를 알게 됐다. 만명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출입을 통제했다. 서현은 경비를 깨고 만명을 빼돌려 만노군으로 데리고 갔다. 『삼국사기』는 벼락이 쳐서 문을 깨부수는 틈을 타 만명이 도망을 쳤다고 기록했다. 그렇게 야합을 해서 낳은 아이가 유신이다.

김서현이 그랬듯이 김유신도 결혼을 통해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애를 썼다. 김유신이 김춘추에게 접근해 여동생 문희와 결혼을 성사시키는 과정을 보면 첩보전을 방불케 한다. 그는 우선 김춘추와 축국을 하면서 옷고름을 잡아떼고 옷을 고쳐주겠다며 집으로 유인한다. 문희에게 옷고름을 달게 한 뒤 자연스럽게 남녀관계로 발전시킨다. 김춘추는 이미 부인이 있었다. 김춘추에게 별다른 소식이 없자, 마당에 불을 붙여 연기를 피어오르게 하고 문희를 불에 태워죽인다는 소문을 낸다. 이 소문이 선덕여왕의 귀에 들어가고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책임을 지라고 추궁한다. 문희는 결국 김춘추의 부인이 되고 왕비가 됐다.

김유신장군릉.

증조부는 나라를 들어 바쳐 진골이 됐고 할아버지는 공을 세웠으나 주류세력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신라 최고 엘리트 가문의 사위가 돼 각종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김유신이 조상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를 맺어야 할 운명이다. 그는 과감히 천관녀를 버렸다. 그리고 영웅으로 거듭났다.

세월은 덧없이 흘렀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던 백전노장도 세월 앞에서 무기력했다. 그는 만년에 천관녀가 살던 집에 그녀의 이름을 따 절을 지었다. 말의 목을 베었던 그 자리다. 돌아서던 그의 뒤통수를 보며 그녀가 통곡하던 그 길이다. 천관사는 김유신이 살던 재매정에서 남천 건너 직선거리로 불과 200여m도 안 되는 거리다. 빤히 보이는 거리다. 김유신은 집에서 훤히 보이는 천관녀의 집을 보면서 늘 마음 한쪽이 알싸해 왔을 것이다.

김유신이 만년에 이 절을 지었다는 근거는 1974년 3월 천관사지 동편에서 ‘태대각간’이라는 돌 조각을 발견한 데 찾을 수 있다. ‘태대서발한’이라고도 불린 태대각간은 신라가 망할 때까지 최고의 관등이었고 김유신 외에는 누구도 이 벼슬을 받지 못했다. 프로야구로 따지면 영구결번 같은 것이었다. 김유신이 태대각간 벼슬을 받은 해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해였으므로 김유신의 나이 73세 때였다. 그러므로 김유신 만년에 이 절을 세웠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누구나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회한 하나는 지우고 싶어 한다. 김유신에게는 천관녀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내내 오래 묵은 상처였는지 모르겠다. 김유신은 태대각간이 되고 5년 뒤에 죽었다. 죽어서 흥무대왕으로 추봉됐고 조선시대에 와서 서악서원에 제향됐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는 이인로의 ‘파한집’에 처음 소개된 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계속 윤색됐다.

“천관이란 절집 이름은 본디 사연이 있다더니/ 세워진 유래를 듣고는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 다정하신 공자는 꽃 숲에서 흠뻑 위했건만/ 아리따운 여인을 말 앞에서 흐느껴 운다/ 말도 정이 들어 다니던 길을 갔을 뿐이고/종은 무슨 죄 있어 부질없이 매질인가/ 그대 남긴 그 노래 너무도 절묘하여/ 달밤을 함께 하며 만고에 전하리라.” -이공승의 ‘천관사’

조선에 들어와서도 이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버전이 계속 업그레이드된다. 원교 이광사는 ‘참마항(斬馬巷)/ 말의 목을 벤 거리’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짓거나 베껴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을 전파한다. 서거정은 ‘경주 12영’ 중 ‘김유신의 묘를 지나며’라는 시에서 ‘옛날 천관사는 그 어드메에 있느뇨/ 만고에 미인의 성명까지 따라 전하누나’라며 애절한 사랑의 아픔을 노래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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