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9년 3·1운동으로 신흥무관학교는 새로운 터전이 필요했다. 1912년부터 자리 잡았던 통화현 합니하는 천험의 요새였지만, 독립의 열기를 품고 몰려드는 청년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탈출한 애국청년들과 재만(在滿) 청년들이 만주로 모여들어, 신흥무관학교도 성황을 이루었다. 이에 본교를 고산자 부근 하동(河東) 대두자로 옮기고, 합니하에 있던 학교는 분교로 삼았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919년 5월 정식 사관학교 개교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신흥무관학교는 추가가와 합니하에 이어 고산자까지 세 개의 교사를 갖게 되었다. 훈련을 받은 학생들도 늘어났다. 이에 대해 이상룡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현재 새로운 학교에서 양성한 우등 자격을 가진 사람이 5~6백 명이며, 2·3등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 7~8백 명으로, 새로 모집되어 아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다수인데 낱낱이 숫자를 들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 ‘답도산창호’, ‘석주유고’)

새롭게 모집되어 아직 훈련을 받지 못한 학생을 빼더라도 그 수가 1,200~1,400명에 달했다. 신흥무관학교와 더불어 독립군단 서로군정서도 활기를 띠었다. 군정서 조직은 독판부(대표부)·정무청(민정담당)·군정청(군정담당)·참모부(군사지휘) 등으로 구성되었다. 최고 대표인 독판에는 이상룡, 군사지휘를 총괄하는 참모장에는 김동삼이 선임되었다. 그밖에 적지 않은 경북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서로군정서는 북간도를 중심 무대로 활약하던 김좌진과도 공조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는 석주 이상룡이 1920년 봄 대한군정서 김좌진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된다. 편지의 골자는 “이장녕을 파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와 대한군정서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니, 지금 진행 중인 업무를 거두고 이장녕을 파견하겠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이미 다른 임무를 띠고 있었던 이장녕을 기꺼이 파견한 것이다. 더불어 이상룡은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헤아려 진실한 마음으로 연대하여 경계를 두지 말고 단결하여 함께 나아가자는 마음도 전하였다.

이렇듯 3·1운동 이후 경북인들의 주요 무대였던 서간도에서도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안으로는 신흥무관학교를 확장하고 서로군정서를 꾸렸으며, 밖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좌진의 군정서와도 협력하였다. 그러나 이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할 무기를 조달하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재정이었다.

군정서를 이끌었던 지도자 이상룡에게는 애타는 시간이었다. 이에 그는 “무기에 대해 말하면 이곳이 북으로는 러시아 땅과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중국과 통하는 곳이라, 참으로 상당한 자금을 가지고 있다면 수입할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시간만 끌고 준비한 것은 적으니, 호기를 놓치고 초심(初心)을 저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심히 염려스러울 따름입니다”. 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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