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호수 바라보며 한 바퀴 걸으면 낭만적

호반선착장 오리배는 움직이지 않고 건너편 놀이기구가 비에 젖어 적막해 보인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주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즈음에 선배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와 드라이브나 하자고 제안한다. 어디라고 딱히 정한 데는 없었지만 걷기 좋고 풍광 좋은 보문호수가 떠올라 길을 나선다. 호숫가 힐튼호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둥근 원형전광판이 있는 ‘보문호반길’ 시작점인 호반광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비 오는 호수를 바라보며 보문호 한 바퀴를 도는 호반길 걷기는 퍽이나 낭만적일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화창한 날씨였다면 많은 탐방객들이 즐기러 나왔겠지만 흐리고 궂은 날이라 오히려 한적한 게 마음에 든다.

호반 산책로에 핀 배롱나무의 붉은꽃들이 더욱 선명하다.

보문호반길의 총 둘레가 6.5㎞로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고 안내한다. 산책로 들머리에 있는 찻집에서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고요한 호수를 바라본다. 평화롭게 쉬고 있는 오리배 선착장이 눈에 띄며 건너편 야트막한 산 그림자가 호수에 떠 있고 짙은 회색구름만 무심하게 하늘을 이고 있다.

경주 보문단지는 1971년 경주종합개발계획사업의 일환으로 종합휴양지 조성을 목적으로 개발되어 1979년 4월 1단계 사업 준공과 함께 개장하게 된 한국관광산업의 1번지로 경주의 역사적 특성을 살려 고대와 현대가 잘 어우러지게 조성되었으며 전 지역이 온천지구 및 관광특구로 지정된 내륙형 종합관광휴양단지라고 알려진 곳이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은 볼 수 없으나 짙은 녹색 숲 터널을 이루는 산책로.

인공호수인 보문호 주변으로 특급호텔과 콘도, 온천, 골프장, 야외공연장, 놀이시설 등 각종 문화레저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고 세계문화엑스포가 개최되는 세계적인 관광지로써 대한민국 제일의 관광 명소라 경북지역의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165만㎡(50만평)의 보문호를 비롯한 보문단지의 넓이가 총 798만6000㎡(242만평)이라 하니 가히 50년 전 선지자(先知者)들의 혜안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추적거리는 비를 맞으며 산책로를 걷노라면 까마득히 먼 옛날에 대한 그리움마저 느껴지는 운치가 만들어진다. 봄날에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숲길이 짙은 녹색의 물결이 되어 빗속을 함께한다. 저만큼 떠 있는 물너울다리의 아치가 그림처럼 다가오고 잔잔한 호수 위에 일렁이는 산 그림자가 빗방울에 쓰러진다. 물비린내가 코를 자극하는 것도 비 오는 날의 호숫가 풍경이라 정겹다. 산책로 가장자리에 피어있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들이 더욱 선명한 색으로 반기며 징검다리처럼 박힌 돌길이 가지런히 앞질러 나선다.

전망 좋은 벤치에 앉은 남녀가 더욱 정답게 보이고 우산을 받쳐 들고 데이트에 열중인 청춘 남녀가 부러워 보인다. 곧게 뻗은 산책로에 오래된 벚나무가 숲 터널을 이루고 텅 빈 수상공연장에는 한기마저 느껴지는 시간이다. 100m나 치솟는 고사(高射)분수가 말없이 멈춰서 있고 호수 한가운데까지 내려온 산이 물끄러미 탐방객을 맞는다. 수상공연장을 지나 숲 속 오른쪽에는 파란 잔디가 잘 깎여진 골프장에는 인적이 보이지 않고 졸고 있다.

보문호반길 시작점인 호반광장에 있는 원형 전광판 모습.

굽이도는 호숫가에 연두색 물감을 푼 듯 지라 난 너른 풀밭이 눈길을 끌고 건너편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떠 만든 건물이 숲 속에서 얼굴을 내민다. 호수와 나무숲, 콜로세움 등 꼭 유럽의 풍경이다. 다시 호수를 본다. 멀리 호텔과 콘도, 놀이시설들이 물속에 투영되어 그림이 되어 있고 지나는 산책로 옆에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진 카페 안에는 차를 마시는 사람들 모습이 영화장면처럼 자연스럽고 행복해 보인다.

호반광장에서 2.4㎞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물너울교의 아치형 다리가 호수에 투영되어 데칼코마니(대칭되는 무늬를 만드는 회회기법)를 만들고 보문호반길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다리이름이 예쁘기도 하지만 다리 위에서 보는 호수와 동궁원 등 볼거리가 많아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물너울교를 지나면 보문호반길의 절반을 돈 셈이다. 반대편에서 보는 관광시설들이 또 다른 볼거리로 만나지고 호수 상류 쪽으로 난 산책로를 휘적휘적 걸어 가다보면 우리가 아주 오래 알고 있는 시(詩)가 적힌 큼직한 바위를 만난다.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이곳 경주 출신인 박목월(朴木月)의 유명한 시, ‘나그네‘가 거기 있다.



- 강나루 건너서 밀 밭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주옥같은 시구(詩句)의 낭만에 취해 우산을 접고 비를 맞는다. 차가운 빗물이 얼굴에 닿아 온몸으로 내려도 상큼한 기분으로 비를 타고 길을 간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호숫가를 걸으며 어지러운 세상사와 번뇌를 잊는다. 호수 너머 찬란한 현대문명을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노라면 언제 우리가 저곳에 있었든가 할 정도로 까마득히 먼 옛날 같아진다.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 되고 있다. 걸으면서 참으로 진솔한 마음을 만들며 함께하는 이들과 교감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정원과 그림같은 집이 있는 카페에서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있다.

높은 돌담이 쌓여 있는 한옥과 양옥이 함께하는 이색적인 찻집에 사람들이 많다. 편안하게 누운 사람도 있고 느긋하게 앉아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 모습이 보기에 좋다. 비 오는 호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차 맛이 어떠할지 새삼 물을 필요가 없을듯하다. 보문호반길에는 이런 풍광들이 있어 지루할 수가 없다. 짙은 구름 사이로 하얀 구름이 스치듯 지나가는 하늘이 보문호수에 그대로 그려지고 비 그친 수면에 반짝이는 물결이 눈의 피로를 풀어주고 있다. 보문호 상류지점 전망대에서 보는 경주시내 쪽 하늘이 조금씩 열리고 잔잔한 호수와 함께 고요를 안기며 시선을 빼앗는다.

보문호반길 입구에 있는 찻집에서 본 호수와 호반선착장 모습.

물에서 자라나는 버들나무가 청송 주산지의 왕버들나무를 연상케 하고 휘어진 가지가 물속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어디가 나무 등걸이며 물속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호반광장 쪽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물속에 잠겼다. 장맛비에 물이 불어나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다. 힐튼호텔 쪽으로 건너가기 전에 있는 경주월드의 청룡열차와 바이킹 롤러코스터 등 놀이시설에는 괴성이 터져 나오고 간간이 돌아가는 원형 대관람차(大觀覽車)의 모습이 보문관광단지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고 있다.

경주세계엑스포가 열리는 공원에 높게 세워진 경주타워(높이 82m)에 신라천년의 영화를 말하듯 황룡사지 구층목탑의 음각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건너편 모 기업의 연수시설로 쓰이는 구층목탑 형태를 모방한 건축물과 신라밀레니엄파크의 신라촌이 옛 신라의 모습을 재현하고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 외관에 장식된 비상(飛翔)하는 천마(天馬)가 신라인의 기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듯하다.

보문호반을 한 바퀴 돌면서 느껴보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움에 다시 한 번 존경과 긍지를 가져보며 세계적인 관광지 경주가 대한민국을 더욱 빛내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신라천년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 이렇게 훌륭한 종합휴양시설을 설계하고 만들어낸 선지자들의 노력과 땀으로 우리가 행복을 누리며 편안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한다.

길이길이 가꾸고 빛내어 자손만대에 물려줄 수 있는 문화유산을 고작 두어 시간 남짓의 걸음으로야 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여기 보문호반길에 우리가 남길 흔적이라도 기억했으면 한다.

아름다운 호숫가를 빗속에 걷는 낭만에 신라의 숨결과 미소를 담아 일상의 번잡함을 잊을 수 있어 좋다. 이것으로 ‘걸어서 자연 속으로’ 가는 ‘힐링 앤드 트레킹’의 열 번째 이야기를 잔잔한 호수에 묻어두고 싶다. 

글·사진=김유복 경북산악연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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