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벌레가 되더라도 책벌레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책벌레의 몸을 받더라도 책에서는 잠이나 자고
동트거든 나가서 장수벌레나 개똥벌레를 돕고
들어오면 쌀벌레나 좀벌레를 돕겠습니다
책벌레가 되더라도 과식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루에 한 줄
짜고 맵고 쓴 글자만 골라
약으로 먹겠습니다

청컨대, 한 번은 누에가 되고 싶습니다
외롭게 자다가, 홀연히
당신 앞에다
녹의홍상 한 벌
꺼내놓으렵니다
무당벌레나 자벌레만 되어도 당신을 위해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곤충도감에서 자야겠습니다


<감상>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어 사회와 가족들에게 소외된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벌레가 되고 싶다고 하니 의외다. 평생 책만 보고 산 사람은 책벌레가 되기 싫은 법. 하루에 한 줄의 키워드만 삼켜도 능히 책 한권을 읽은 것이나 진배없다. 전생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현생에서 공부를 쉬엄쉬엄해도 수재(秀才)가 된다. 누에는 얼마나 깨끗한 벌레인가. 당신께 옷 한 벌을 선사해 주고, 가족에게는 살림을 일으키는 고마운 존재다. 오늘은 벌레가 누워 자는 방, 잠실(蠶室)에서 함께 자고 싶어진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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