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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제도(制度)의 취지(趣旨)
[아침광장] 제도(制度)의 취지(趣旨)
  •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20년 08월 12일 16시 0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8월 13일 목요일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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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미국에서의 노예제(奴隸制) 존폐를 둘러싸고 벌어진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1861-1865)에서 노예제를 유지하고자 한 남부를 꺾고 승리한 북부의 공화당(Republican Party) 정부는 이 ‘괴상한 제도(peculiar institution)’를 완전히 뿌리 뽑고 사회 내에서 인종 간의 평등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에 1865년에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비자발적인 예속을 금지시킨 수정헌법 13조, 1868년에는 미국에서 출생하거나 귀화한 사람, 행정관할권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한 수정헌법 14조, 그리고 1870년에는 인종, 색깔, 이전의 노예 상태 등에 상관없이 투표권을 보장하는 수정헌법 15조를 통과시켰다. 이와 같은 수정조항들의 적용을 받았지만 흑인들의 권리 신장을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남부 주들은 소위 ‘흑인단속법(Black Codes)’과 ‘흑인차별법(Jim Crow Laws)’ 등을 도입, 1867년 이전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던 사람들의 후손들 중 문자해독능력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만 투표권을 줌으로써 흑인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정치 환경을 조성하였다. 또한 인종 간의 평등을 ‘이론적으로’ 인정하면서 현실에서는 백인 이용 시설과 흑인 이용 시설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등 법의 테두리 안에서 흑인 차별을 지속하였다. 이렇듯 수정헌법의 제정 취지를 교묘하게 무시했던 인종 차별의 유산은 최근의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건에서 보았듯이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 깊은 상처와 심각한 분쟁의 소지로 남아 있다.

최근 이천과 용인에서 연이어 발생한 물류 창고 화재 사고의 원인과 관련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고용부장관이 ‘제도나 기준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지금 한국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개발도상국으로서 선진국들의 시스템을 관찰하고 그 장점들을 배울 기회가 많았던 만큼 장관의 말대로 대한민국 사회의 골격을 이루는 법과 제도는 선진국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선진국 레벨의 법과 제도에 의거한 한국 사회의 운영 수준 또한 선진국 레벨이라고 우리는 과연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가. 왜 대한민국의 훌륭한 법과 제도가 현장에만 가면 힘을 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지는 것일까.

이 세상에 100% 완벽한 법과 제도란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타이트한 규율을 만들려고 노력해도 모든 허점을 다 커버할 수는 없으므로 법망을 피할 방법은 항상 생겨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 법과 제도에 명시된 외형적 규정만 형식적으로 지킨다고 한다면 사고와 부작용이 끊길래야 끊길 수가 없다. 한 사회의 역량(力量) 강화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법과 제도의 규정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구성원들이 그 법과 제도의 도입 취지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이에 공감하여 이를 살리려고 노력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취지에 충실해야만 법과 제도의 악용이나 오용(誤用)이 방지되어 그 부족함이 보완될 수 있기 때문이다. 150여 년 전의 미국 남부가 해괴망측한 꼼수를 쓰는 대신 수정헌법의 취지를 살려 흑인과 백인이 진정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에 노력했다면, 지금 미국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 사회에 검경 수사권 조정 등과 같은 선진국형 개혁을 꾸역꾸역 도입만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개혁의 당사자들이 개혁의 취지에 충실하게, 개혁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제도를 운영할 의지가 있어야만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개혁을 통한 역량 강화를 정말 도모할 수 있느냐를 알기 위하여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딱 한 가지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개혁 당사자들에게 과연 그럴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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