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속물(俗物, 교양이 없거나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급급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정리가 잘 안 됩니다. 우선 그 반대말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범주화가 덜 진행된 말이라는 거지요.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교양인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고 양심가도 아니고 신사도 아니고 군자(君子)도 아닙니다. ‘군자’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말인데 오래 되어 이미 죽은 말입니다. 요즘 쓰는 말 중에서는 교양있고 식견 넓고 세속에 초월한 사람을 가리키는 맞춤한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결국 속물일 수밖에 없고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물의 반대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물의 재탄생, 그런 제목으로 본격적인 우리시대의 속물론을 한 번 써볼까 싶기도 합니다. 아직은 역부족이지만 자료가 좀 모이면 언젠가는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글쓰기의 방향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식민지 외상과 신분사회의 붕괴, 이념 전쟁과 분열적 자아의 형성, 자아 보전 의지와 속물근성, 근대화의 수행과 속물의 재탄생 등입니다. 우리사회가 어떻게 속물들의 세상이 되었는지, 스노비즘(snobbism, 고상한 체하는 속물근성)이 왜 주류적 지식문화로 부상하게 되었는지 저와 제 주변의 삶을 출발점 삼아 원심적으로 검토해 보고 싶습니다. 반성적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사회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는 3, 4, 5, 60대는 전형적인 속물들입니다. 저부터 진성(眞性) 속물입니다. 물론 성별, 세대별, 계급별 차이는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속물의 정의를 새로 쓸 만큼 큰 것은 아닙니다. 흥미로운 것은 속물성에 대한 세대 상호 간의 평가가 아주 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신랄하게 타세대의 비난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5, 60 대의 기성세대, 기득권 세력의 속물근성입니다. 제가 속한 그 진성 속물 세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흔한 표현으로는 진보와 보수입니다. 그러나 그 표현으로는 그 세대의 이중성을 다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대학 시절 사회개혁 운동가 그룹에 속했다고 해서 다 진보로 볼 수도 없고 그 시절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공부만 했다고 해서 다 보수로 볼 수도 없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부터는 그 경계가 더욱 흐려졌습니다. 어느 쪽이 더 양심적인가, 어느 쪽이 더 ‘선한 사마리아인’에 가까운가라고 물으면 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단어는 ‘속물’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 표적은 소위 ‘82년생 김지영’ 세대입니다. 소설 제목에서 따온 세대명입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걸치는 대졸 학력의 여성들인 그들이 왜 속물 비판에 자주 노출되는지 그 자세한 사정을 저는 모릅니다. 다만, 그 나이 또래의 딸을 둔 입장에서 그들 세대에게 동정과 연민의 심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속물적이라고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전쟁의 포연 속에서 태어난 그들 부모 세대들의 탓일 겁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은 속악한 생존 경쟁의 한 가운데로 몰렸던 세대입니다. 오직 ‘자아 보전’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살아남는 게 가장 큰 삶의 목적이었던 그들이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식들을 기르지 못한 것이 불찰이라면 가장 큰 불찰입니다. “농구 스타나 가수들이나 따라다니다가 지금은 맘카페에서 서식 중인 ‘82년생 김지영’들이 이번에 아파트 살 기회 놓치면서 거세게 분노를 표출한다. 허약하고 내면의 뿌리가 없는 그 지영이들에게서 시기, 질투, 비교질을 빼면 뭐가 남을 것인가?”라는 비난은 그래서 너무 가혹합니다. 그런 ‘표현의 자유’를 누리려면 한시라도 빨리 속물의 반대말을 찾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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