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필자는 근현대 정치가 중 몽양 여운형의 행적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항일운동을 적극 펼치고 민족의 미래와 한민족의 평화공존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그였기에 해방 후 그가 남긴 미완의 족적에 아련한 아쉬움이 남았다. 10년 전 대구 남구의 고물경매장에서 뜻밖의 묵적으로 인연을 가졌다. 고물을 취급하는 지방의 상인이 가져온 오래된 파지에 초서체 ‘용(龍)’자가 쓰여 있었다. 옆에는 아주 희미하게 빛바랜 인주의 전서체와 예서체로 ‘여운형’ 성명인과 ‘몽양’ 아호인이 찍혀있었다. 기운생동 하는 필체가 범상치 않아 매입하게 되었다. 그때 아무도 한자 전서 예서를 이해하지 못하여 혼자 단독으로 입찰하여 가지게 된 것이다. 구입 후 새롭게 표구하고 지금까지 잘 보관하여 학강미술관의 대표 수장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몽양의 수적을 갖게 되어 그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자후 같은 연설과 행보를 생각하며 ‘용’자의 필력을 지금까지 감상하고 있다. 이어서 대구 출신의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독립운동가 청정 이여성(1901~?)을 알게 되었다. 그는 화가 이쾌대의 친형이다. 조선, 중국, 일본의 동북아를 넘나들다 광복 후 여운형의 피살로 말미암아 북조선으로 간 것을 알았다.

몽양 여운형의 용자 글씨. 학강미술관 소장
몽양 여운형의 용자 글씨. 학강미술관 소장

본명이 명건(明建)으로 불리우는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은 지금의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에서 태어나 칠곡에서 자랐다. 부잣집 아들로 기독교 사상과 신학문을 받아들여 일찍부터 진취적 사상을 보였다.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1918년 김원봉, 김약수와 함께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대구에서 혜성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다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릿쿄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다녔다. 일본유학 시기에 1923년 대구에서 개최된 첫 대구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부에는 이여성 군의 유우(悠牛)외 16점…합 43점 인 바, 눈에 띄는 가작이 이외에 많아 대구에 이만한 미술가가 있었는가를 의심할 만큼 되었고…”라고 동아일보에 소개되었다.

이후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상하이에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연구하여 민족통일의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다. 귀국 후 1932년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청전 이상범을 만났다. 1934년 서화협회전에 출품작 ‘어가소동’이 입선하면서 이듬해 동아일보사 사무실에서 이상범과 2인전을 가졌다. 신문사 부장 시절 ‘숫자 조선연구’라는 전 5권의 서적을 펴내면서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숫자로 연구하였다. 대표적 저서로 ‘약소민족운동’ ‘숫자조선연구’ ‘조선복식고’등 이다. 이여성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 사직당한 후 수묵담채화에 몰두한다.

1944년 8월 이여성은 여운형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였다. 광복이 되자 각종 중앙조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고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에 참가하였다. 이어 사회노동당의 중앙상임위원으로 피선되었다.

혼란한 정국으로 서북청년단원에게 여운형이 피살되는 큰 사건이 있었다. 이여성은 여운형장례 사무를 주도하였고 구속되었다. 자신의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는 1948년 초 월북하여 황해도 해주에서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김일성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 시절 대구의 황해도 출신 원로화가 신석필이 조교로 근무하며 이여성에게 배움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정치에서 물러나 학자의 삶을 살았다. 고고학, 한국미술사, 건축사에 관심을 가졌고 ‘조선미술사개요’ 책을 집필하였다.

교수 시절 “전체주의 체제 하에 학문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다”는 발언으로 평안남도 순천에 도자기 화공으로 숙청되었다. 김원봉도 같은 시기 숙청되었다. 대구 출신의 엘리트 지식인 이여성은 이렇게 남과 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민족주의 사회주의자로서 생을 마감하였다. 최근 이여성에 대한 재평가로 정확한 행로와 발자취에 대한 사실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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