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흥무관학교 확장과 더불어 독립군단 서로군정서의 독립전쟁 준비도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1919년 갑자기 늘어난 만주 이민자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요인이 컸다. 이러한 가능성의 바탕에는 ‘논농사’의 성공도 큰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생존의 문제는 ‘의지’와 ‘정신’ 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기반이 필요했다. 이에 대해서는 만주의 ‘곳곳에서 이루어진 신풀이와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지난 4월 3일자 칼럼에서 소개하였다.

논농사가 안착되자 한인 마을에 이민자들이 늘어났다. 허은(許銀·1909~1997, 2018 건국훈장 애족장)은 1918~1919년 이민자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늘어나는 이민자들의 가옥과 토지가 결정되어 정착할 때까지 보살피는 일도 앞선 이들의 몫이었다. 이처럼 어느 정도 기반과 체계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무관학교에서 학생을 기르고, 군대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기에는 후방의 역할, 즉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은 무관학교 등 학생을 양성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초창기 망명길에 올랐던 여아(女兒)들은 학교 교육에는 배제되어 있었다. 학교에서의 수학은 주로 남성들의 몫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허은은 “아재들은 학교에 다녔는데 나는 여자라고 학교에 넣어 주지 않았다. 어른들께서는 아재들을 하굣길에 만나면, 이제 학교 갔다 오냐고 반가이 인사하면서, 나는 학교라 말만 꺼내도 야단을 치셨다”고 회고하였다.

즉 1910년대 만주 망명 여성 가운데 수학과 교수의 주체로 활동한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학생들을 돌보는 일에서 비껴갈 수는 없었다. “집이 멀거나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애국지사들이 각각 나누어 맡아 하숙을 시켰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생활을 돌보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후방 역할도 기꺼이 수행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는 의복도 모두 단체로 만들어서 군정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해 주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사서 대량으로 생산했다.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식 검정 두루마기를 만들어 입도록 했다. 이 두루마기 한 벌을 받으면 다 해지도록 입곤 했다. (중략) 조직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일만 해도 큰돈이 들었다. 또 해 먹이는 일 그 자체가 큰 역사(役事)였다. 작은 국가 하나 경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민족문제연구소, 2010)”

실제 여성들은 서로군정서 대원들의 의·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광복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대량으로 대원들의 옷을 생산했다. 또한 그들을 먹이는 일도 힘겨운 일이었다. “조직원들을 해먹이는 자체가 큰 역사였으며, 작은 국가 하나 경영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 기록은 만주항일투쟁사에서 여성들의 고충을 암시한 중요한 대목이다. 실제로 허은은 회의 때마다 늘 부족한 땟거리를 마련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농사가 흉년일 때는 중국 사람이 경영하는 피복공장에서 단추 구멍 만드는 일감을 가져와 부업을 해서 그 돈으로 음식을 마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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