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박목월 시인은 친구의 죽음을 두고 이별가에서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불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머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아래 생략)”라고 읊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세상을 하직했다. 이승과 저승이 강으로 갈라진다. 곡진하게 하직 인사를 주고받고 싶은데 강이 가로막고 바람까지 훼방을 놓는다.

이승과 저승의 가깝고도 먼 거리감과 인연이 다함에 대한 안타까움을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점층적인 반복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 때문에 저승으로 가는 이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뭔가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다. 더욱이 바람에 날려서, 바람 때문에 더 소통이 되지 않는다.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알아먹을 수 없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를 연발했을까. 썩은 동아줄. 인연의 다함. 나도 그에게 한 마디 애절한 배웅의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내 소리가 강을 건너지 못한다. 바람에 소리가 날아 흩어져버린다. 이별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요사이 정가에서는 전신만신 불통이다. 여와 야 사이의 불통은 이미 오래되었다. 못 알아먹는지 알아듣고도 못 알아먹은 척하는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여당과 야당 사이에 협치는 고사하고 우선 소통이 되지 않는다. 뭐라카노 알아들을 수 없는 말하지를 마라 식이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말 ‘뭐락카노’ 다음이 문제다. 못 들은 척 오불관언이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귀에 거슬린다. 이때는 ‘뭐락캔노, 니 방금 뭐락캔노?’, 아니면 ‘어제 니 뭐락캔노?’다.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알아듣고도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괘심해서 안 되겠다. 한판 붙어보자. 용서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이때부터 한참은 공방전이 치열해진다. 정치평론가들이 논평할 일도 많아진다. 한 마디로 살판난다.

‘뭐라카도?’라는 말이 있다. 직접 들은 말이 아닐 때는 ‘뭐락카도?’로 되물어 확인하고 싸움의 태세를 갖춘다. 말을 옮기는 사람이 있고, 싸움을 붙이는 사람이 있다.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 이 역시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시끌벅적해진다. 말의 전부를 옮긴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만 악의적으로 찍어내었다는 둥, 논쟁이 분분해진다.

언론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잘은 몰라도 언론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시끄러움 속에서 유명세를 만들어 보겠다고 빠지지 않고 끼어드는 사람도 있다. 무책임하게 ‘카더라’ 방송도 등장한다. 많은 SNS가 놀아나고, 유튜브 방송이 쉬지 않고 지저귄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뉴스가 범람하고 열심히 퍼 나르는 사람들이 지치지도 않는다.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나부댄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사이에 오고 간 싸움 아닌 다툼도 마찬가지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은 문제로 서로 엇박자를 집는다.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을 왜 자꾸 안다리를 걸어 시끄럽게 만드느냐고 또박또박 스타카토 식으로 강조하여 나무라는 말에도 손들고 나올 기색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니 애가 달 일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기를 얻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뭐락카노, 뭐락캔노, 뭐락카도”가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다투더라도 천박한 느낌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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