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유미주의자와 실용주의자의 차이쯤 될까요? 한 번씩 길고양이를 두고 격렬하게 갈등을 빚는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르시시즘(自己愛)을 기준 삼아서 고양이 애호와 고양이 혐오를 나누어 보기도 합니다. 자기애가 강한 이들이 반려동물을 가까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고양이를 사랑하는 심리는 좀 복잡합니다. 고양이 자체가 주인을 섬기는 일에 성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양이 집사’라는 말을 흔히 듣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고양이는 주인을 섬기는 동물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양이 애호 심리를 분석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나르시시즘에 보상심리(평소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싶었던 마음의 반영)를 더하고 나아가서 유미주의적 탐미성(耽美性, 아름다움을 추구해서 깊이 빠짐)까지 고려해야 고양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양이는 문학적 소재로 많이 등장합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쓰메 소세키, 1905)라는 소설이 대표적입니다. 저도 ‘고양이 키우기’(1987)라는 중편을 한 편 쓴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묘씨생(猫氏生)’(황정은, 2011)이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설은 아니지만 프랑스의 유명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에도 고양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전에도 일부 인용했던 대목(‘고래와 고양이’)입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여러 마리의 가축들 가운데서 생겨난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소설가 이브 나바르에게 갖다 주었더니 그는 고양이에게 ‘티포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내 소설 『마왕』의 주인공 이름이다. 6개월 뒤 그 집에 찾아갔다 와서 나는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티포주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네. 정말이지 내가 자네에게 갖다 주었을 때는 그저 평범할 뿐이었던 그 고양이가 자네의 열성적인 배려 덕분에 보기 드문 짐승, 요컨대 예외적인 사내가 되었네 그려. 그 녀석에게는 내가 동물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활기, 젊음, 광채, 자신감이 넘치고 있어. 그 녀석이 때로 감당 못하게 군다 해도 그것은 바로 어떤 공허감을 메우기 위하여 자네가 그 녀석에게 기대하는 바에 꼭 맞는 만큼만 그러는 것일세.” 그런 말을 적어 보내자니 우리 집 정원에서 괴물처럼 엄청난 덩치로 자라버린 코카서스 산 어수리나무를 보고 어떤 여자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니까 그렇죠. 이 나무가 그걸 아는 거예요.” 나중에 이브 나바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자네는 내게 티포주를 줌으로써 내게 큰 도움을 주었네. 그러나 자네는 나한테 공쿠르 상을 줌으로써 나를 속속들이 망쳐놓았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자살에는 전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미셸 투르니에(김화영), 『외면일기』>


투르니에의 말을 빌리면 “어떤 공허감을 메우기 위하여 우리가 기대하는 바에 꼭 맞는 만큼만 그러는 것”이 바로 고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고양이를 키우는 일이 ‘투사(projection, 내면의 충동이나 생각을 외부 세계로 옮겨놓는 정신 과정)’의 일환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인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 투사의 대상이라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물론 투르니에의 고양이 이야기는 그것만 전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쓸데없는 것으로 자신의 공허감을 메꾸었을 때 어떤 비극이 생기는지를 말하고 싶은 게 그의 본심입니다.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 오히려 진짜 삶의 유력한 동반자가 될 때가 있다는 것을 고양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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