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떠난 왕비 그리워 한 곳에 묻힌 '신라시대 로맨티스트'

흥덕왕릉 전경. 능으로 가는 초입 좌우로 무인상과 문인상이 있다.

흥덕왕릉은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어래산 기슭, 능골에 있다. 육통은 원당 못밑 존당 학지 거리동 능골 등 6개 자연부락의 중심에 자리한 마을이고 능골은 흥덕왕릉이 있는 고을이다.

흥덕왕은 왕비 장화부인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1,200년 세월 지나도록 이름을 떨쳤다. 왕비가 죽은 뒤 암컷을 잃은 수컷 앵무새를 보면서 시를 썼다. 시는 전해지지 않으나 『삼국사기』는 ‘왕이 왕비를 그리워하여 못내 잊지 못하고 서운해하면서 즐거움을 멀리하였다’고 기록한다. 시녀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내시가 드나들며 심부름을 했다. 죽어서는 왕비와 합장해 저 세상까지 사랑을 이어가려 했다. 

『삼국유사』 ‘흥덕왕 앵무’편은 왕의 순애보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흥덕왕이 즉위하고 얼마 안 돼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왕에게 바쳤다.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고 수컷만 남았다. 홀로 수컷은 슬피 울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왕이 새 앞에 거울을 가져다 두게 했다.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가 제 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다가 그것에 제 그림자임을 알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게 끝이다. 짧은 글은 긴 여운을 남겼다. 사람들은 왕의 순애보에 감동했다. 흥덕왕의 애끓는 사랑을 소재로 시를 쓰고 에세이를 지었다. 흥덕왕을 ‘신라시대의 로맨티스트’라고 하기도 하고 이들 부부를 일컬어 ‘천년의 사랑’이라고도 했다.

흥덕왕을 로맨티스트로 여기는 이들은 막상 흥덕왕릉 앞 안내표지판을 보고 놀랄지 모르겠다. 안내 표지판 글이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다. “이 능은 신라 제42대 흥덕왕을 모신 곳이다. 흥덕왕은 형인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중략) 흥덕왕이 죽은 후 먼저 세상을 뜬 장화부인 능에 합장하였다고 하며, 발견된 능의 비석 조각에 ‘흥덕’이라는 글자가 있어 흥덕왕릉으로 확인하였다”

표지판은 ‘흥덕왕은 형인 헌덕왕과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고 설명한다. 흥덕왕 김수종은 42대왕, 헌덕왕 김언승은 41대 왕으로 형제간이다. 조카 애장왕 김청명은 40대 왕인데 39대 소성왕 김준옹의 아들이다. 소성왕과 흥덕왕 헌덕왕은 형제간이다. 소성왕이 집권 1년 반 만에 죽자 13세의 애장왕이 왕이 됐다. 삼촌 김언승이 섭정을 하고 김수종이 뒤를 받쳤는데 애장왕이 성인이 되면서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불안해진 삼촌들이 조카를 죽이고 조카 뒤를 이어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왕위에 오른 것이다. 삼촌들은 애장왕만 죽인 게 아니다. 애장왕의 동생인 체명까지 죽였다. 체명은 삼촌들의 쿠데타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흥덕왕의 부인인 장화 부인이 애장왕과 체명의 누나라는 사실이다. 장화부인은 남편이자 삼촌인 흥덕왕이 두 동생을 살해하고 왕위를 탈취하는 현장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이쯤 되면 흥덕왕이 장화부인을 끔찍이 사랑했다는 대목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7년 후인 826년 10월 남편이 왕위에 올랐고 2개월 뒤에 장화부인이 죽었다. 역사책은 장화부인의 죽음에 대해 말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왕은 장화부인의 무덤을 안강읍 육통리 현재의 흥덕왕릉으로 정하고 자신이 죽으면 그 자리에 합장을 하라고 하명했다. 자기가 묻힐 자리를 미리 정해둔 것이다. 왕은 왜 왕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안강을 신후지지로 택했을까.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죄의식 때문에 열성조들이 묻혀 있는 중심지를 피했던 것은 아닐까. 하여튼 흥덕왕은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는 만큼 대단한 로맨티스트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흥덕왕의 거사는 골육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신호탄이 됐다. 이제 원성왕계의 왕족 중에서 힘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들고 일어나 왕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흥덕왕이 죽자 사촌 동생 김균정과 다른 사촌동생 김헌정의 아들 제융이 왕좌를 놓고 싸웠다. 제융이 김균정을 죽이고 왕이 됐다. 43대 희강왕이다. 희강왕을 도와 싸웠던 김명이 또 희강왕을 죽이고 44대 민애왕에 올랐다. 희강왕과 김명은 6촌 형제이며 처남 매부 간이다. 45대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들도 혈족이다. 이렇듯 39대 소성왕 때부터 박씨인 53대 신덕왕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113년 동안 원성왕계에서 14명의 왕이 배출됐다. 나라가 망국의 길로 치닫는데 흥덕왕이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골육상쟁 속에서 왕비들은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 앞서 말한 대로 흥덕왕비 장화부인은 남편이 두 동생을 죽이자 엄청난 충격 속에 빠졌을 것이다. 문목부인은 동생 김명(민애왕)이 남편 희강왕을 죽이는 현장을 지켜봐야 했고 조명부인 역시 남편 김균정이 동생 김명의 손에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시간이 지나서는 자신의 아들 김우징(신무왕)이 동생 김명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흥덕왕릉 귀부.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는 상당히 훼손됐다.

흥덕왕릉은 몇 가지 이유에서 주목받는 왕릉이다. 우선 경주에 산재한 신라왕릉 가운데 무열왕릉과 더불어 주인이 명확한 왕릉이라는 점이다. 귀부의 비편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나왔다. 신라왕릉으로는 유일한 부부합장릉이란 점도 관심이다.『삼국유사』 ‘왕력’편에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으니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하였다(陵在安康北比火壤 與妃昌花合葬)”로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릉 돌사자상 왕릉의 네 모서리에 각 한마리씩 배치돼 있다.

능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다.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했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무덤의 주위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였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다.

흥덕왕릉 12지신상 중 인상.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은 없고 거북이 모양의 귀부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사진가 김배근의 ‘흥덕왕릉 솔숲’. 김배근은 15년동안 흥덕왕릉의 소나무숲을 촬영하고 있다.

흥덕왕릉이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소재는 소나무 숲이다. 새벽 안개가 짙은 봄·가을에 멋진 풍경을 제공한다.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안개에 뒤덮인 소나무를 촬영하기 위해 몰려든다.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는 굽어지고 비틀어져 멋진 그림을 연출한다. 흥덕왕이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벌였기 때문이었을까, 새벽에 보는 소나무는 섬뜩하다. 칼을 빼 들고 잠복하는 자객 같기도 하고 지옥문을 지키는 케로베로스 같기도 했다.

흥덕왕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상.

사진가 김배근은 15년째 사시사철 흥덕왕릉 소나무 숲을 촬영해 오고 있다. 그의 사진 한 장을 얻었다. 여름 이른 아침에 햇살이 비치는 소나무숲이다. “흥덕왕릉의 소나무는 저마다 마음대로 굽어 있다. 안개가 짙은 새벽에는 제각기 다른 춤을 추는 듯한데 그게 매력이지만 한겨울에는 따뜻한 빛이 굽은 소나무를 파고들며 붉게 물들이는 광경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라고 말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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