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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단] 기린
[아침시단] 기린
  • 김 참
  • 승인 2020년 08월 27일 16시 51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8월 28일 금요일
  • 2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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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에서 놀던 기린이 우리 집으로 온다. 마늘밭 지나고 도랑 건
너 돌무더기와 대밭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으로 온다. 나는 창
문을 활짝 열고 긴 목 위에 있는 기린의 얼굴을 본다. 참 슬픈 얼
굴이다. 보리밭에서 놀던 기린이 돌담 사이 좁은 길 따라 우리 집
으로 온다. 대문 앞 텃밭에 외할머니가 심어놓은 고구마를 넝쿨째
뽑아 먹으며 기린이 온다. 밭에서 잡초 뽑던 이모가 고개를 들어
슬픈 얼굴의 기린을 올려다본다. 나는 대문을 연다. 열린 문틈으로
당근과 가지가 자라는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비닐하우스 위로 새털
구름 흘러간다. 정오가 되면 배고픈 기린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온
다. 굴뚝에서 모락모락 올라와 구름을 향해 새처럼 가볍게 날아
가는 연기를 꿀꺽꿀꺽 삼킨다.

<감상>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기린이 왜 우리 집으로 오나. 기린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시에서 기린의 상징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을 알지 못하므로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거 정겹게 놀았던 추억의 장소에 기린이 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 결핍된 유년의 모습이 기린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고구마, 당근을 뽑아 먹다가 가지를 따 먹는 모습까지 겹쳐진다. 처음에는 혼자서 들판을 노니다가 배고픈 정오가 되면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는 식솔들이 집으로 모여든다.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만큼이나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이기에 연기를 삼킨 기린들은 눈물을 뚝뚝 흘렸을 것이다. 그걸 담으면 한 드럼통이 넘쳐났을 것이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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