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흔히 듣는 우스갯소리에 “교회나 성당에 가면 ‘없는데 믿으라’ 하고 절에 가면 ‘있는 데 없다’고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는 두 종교의 핵심 교리를 장난스럽게, 그러나 의표를 찌르면서,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명제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어느 정도) 믿는가?”는 2000년 전부터 기독교인을 판별하는 시금석 구실을 해왔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 도마(Thomas)가 부활한 예수의 옆구리 상처에 손을 넣어보고서야 그의 부활을 믿었다는 신약성서의 (연약한 믿음을 비판하는) 기록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것만 봐도 기독교에서는 “안 보고서도 믿는 것”을 높이 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다 헛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른바 색즉시공(色卽是空)입니다. 내 안에 든 것을 모두 비워내야 깨달음을 얻고 고해(苦海)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습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점에 가서 철학책을 한 권 샀습니다. 그때만 해도 책과는 거의 담을 쌓고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처럼 학자가 되어서 평생을 책과 함께 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국립사범대 출신은 임용고시 없이 바로 교사임용이 되던 때라 학점만 채워서 무사히 졸업하기를 바라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노력만 들여서 학교 공부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친구와 노는 일, 생계를 위해 돈 버는 일에만 매진했습니다. 그저 아슬아슬한 시절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같이 놀고 함께 돈 벌러 다녔던 절친 중 제때 졸업해서 취직을 한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어 없는 돈에 학교 공부 이외의 책을 한 권 산 것입니다. 『선(禪)의 세계』(고형곤)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앞부분에는 “산도 그 산이요 물도 그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라는 선가(禪家)의 한 명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고등학생 때 본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의 후속편처럼 느껴졌습니다.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겠구나,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책을 볼 일이 아주 없어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성철스님께서 종정으로 취임하시면서 그 법문을 널리 세상에 알리셨을 때도 내심으론 그저 심심할 따름이었습니다. 결국 세상 모든 이야기는 것이 그 ’쳇바퀴 도는 인생‘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것일 뿐이라는 믿음만 들었습니다. 제 공부가 늘품 없이 평생 제 자리 곰배(고무래)인 것도 어쩌면 초년 공부의 그 무지스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좀 길어졌습니다. “코로나는 없다”라는 제목을 걸어두고 제 개인사에 얽힌 장황설만 늘어놓았습니다. 얼마 전 대통령과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코로나19를 내세워(방역의 필요성 때문에) 종교 집회를 막지 말라는 뜻인 듯싶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 “코로나는 없다”라는 말은 그 무지스러운 언사를 타박하는 말입니다. 우리 식대로 표현하자면 “있는데 없다고 하는 것은 불교식 논리인데 왜 기독교 목사가 (코로나가 분명히 눈에 보이는데) 있는 것을 자꾸 없다고 말하는가?”가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그 발언을 반어적으로 비꼬는 말입니다.

저도 어릴 적에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어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주로 제 가정 사정을 잘 아시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간혹 그때 그 말씀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쓰는 글들이 옛날 제가 읽었던 설교집(지금도 서가에 ‘태양아 멈추어라’라는 50년 전에 본 설교집이 꽂혀 있습니다) 내용과 점점 비슷해진다는 것을 자각할 때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랬다면 최소한 이 엄중한 시기에 ‘종교의 자유’를 꺼내서 맥락일탈적인 언사를 함부로 던지는 무지한 목사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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