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항일투쟁 뒤에는 드러나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삶과 역할은 자료의 부재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들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오늘 소개할 김경모(金敬模·1886~1945)와 그 일가 또한 그 가운데 일부일 것이다.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출신의 김경모는 성장하여 안동 예안의 이원일(李源一·1886~1961, 애국장)과 혼인하였다. 이원일은 1907년 안동 내앞마을에 세워진 협동학교에서 수학한 인물이다. 이때 협동학교 교사였던 김동삼은 그의 스승이자, 동지이기도 했다. 뒷날 두 사람은 만주에서 다시 사돈 관계로 발전하였다.

1912년 27세의 김경모는 시부모와 남편, 어린 딸 이해동 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가진 재산이 적었기에 만주정착 과정도 그만큼 어려웠다. 망명 직후 이웃집에 얹혀 자기도 하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 이원일은 도장 새기는 일을 호구지책으로 삼았다.

어려운 과정을 겪어 내며, 가족들은 겨우 중국인 마을인 삼원포 마록구(馬鹿溝) 마을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닥쳐온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10대의 시누이와 시동생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생계 때문인지 다른 임무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이원일은 1913년 귀국하여 8개월을 머물다가 만주로 돌아갔다. 그 사이 김경모는 일가의 살림을 도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안정을 되찾은 것은 1915년 쯤으로 짐작된다. 1915년 마록구에 협창학교(協昌學校)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마록구에 안착한 일가는 망명 동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정착을 위해 힘썼다. 국내에서 만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안내와 정착을 돕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는 이해동의 회고록뿐만 아니라,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즉 이들의 집이 국내에서 들어오는 망명자들의 중요 거점이었다. 특히 1919년 3.1운동 뒤에는 이 집을 거쳐 간 사람들이 많았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여파가 만주 땅에 전해지자 역시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우리 교포들의 반일사상을 더욱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집에는 낯모르는 청년들이 총을 메고 찾아오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식사도 하였고 어떤 때는 잠도 자고 갔는데, 그럴 때는 집 식구들이 한방에 모여 자고 다른 한 방은 비워 주곤 하였다. (중략) 이와 같이 3.1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반일정서와 일차대전 이후 중국정세의 변화는 반일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되어, 몇 해 후 우리 가족이 북만 이주를 떠나기 전까지도 우리 집에 드나들던 독립군들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중략) 이런 정황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니 그 당시 우리 집은 무장독립군의 연락처이자 임시숙소가 되었던 것이다. - 이해동, ‘만주생활 77년’ 중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을 때는 십여 명이나 되었다. 남편 이원일이 없을 때는 시아버지 이강호가 이들을 대접했다. 이를 뒤에서 챙기는 일이 김경모의 몫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경모와 가족들은 이원일을 도와 만주로 망명하는 청년들과 지사들의 거처가 정해질 때까지, 이들을 보살폈던 것이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항일투쟁의 역사 속에는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과 그 역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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