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비 그리고 낮의 비 그리고 밤의 비
그친다, 창백하고 숨 막히는
새벽빛에,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은 본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나무들 아랫길에는 새로운 자줏빛
국경이 생겼구나
경계의 안쪽에는 밝고 옅은 잔디밭:
11월이 남긴 잎사귀가 전부
떨어져버렸네, 개암나무와 가시나무 그리고
더 커다란 나무들로부터. 이곳의 나무들은
죽은 잎사귀는 떨어뜨리지 않았다
회색 풀밭, 녹색 이끼, 번트오렌지 고사리 위에서,
바람은 다시 불어:
물푸레나무가 벗어버린 어린 잎들
길 위에 드문드문 깔아놓았다
놀다가 거기 새겨지기라도 한듯한
작고 까만 물고기처럼.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에 아직 힘겹게
헐벗은 채 매달려 있는 것은
돌능금 나무 한 그루의 사랑스러운 열두 알
노란 사과들.
그리고 각각의 잔가지들이 골짜기 속으로 다시
떨어뜨리는, 셀 수 없는 크리스털
어둡고 밝은 빗방울.

<감상> 태풍을 동반한 비는 수많은 나뭇잎을 떨어뜨리게 한다. 그 나뭇잎은 물고기처럼 흘러가 맨홀을 거쳐 강으로 흘러간다. 애초에 나뭇잎은 물고기의 종족이었을까. 나뭇잎에 꼬리 지느러미가 붙어 있다. 비 온 뒤에 태양은 떠나지 못한 물고기를 길바닥에 화석처럼 새겨놓는다. 빗자루나 자동차에 시달리는 나뭇잎들은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만다. 과실수에 매달려 있는 몇 알의 열매들, 이들은 태풍과 바람을 이겨낸 노아의 방주쯤 될까. 비 온 뒤에도 머금고 있던 빗방울을 떨어뜨린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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