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에서 터져버린 고백이 샐까봐 아무 말 못하겠다

다 빼앗기더라도 마음만은 뺏기지 말라는 뜻을
가지가지에 붉게 매달고 상화 고택 가는 길가에
청사초롱 밝혀 든 석류나무 한 분

불을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불빛이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난 첫사랑처럼 아득하다

세상에 없는 애인은 어디로 갔고
저 불빛은 어디서 왔나

석류 위에도 석류
석류 아래에도 석류

석류 어깨에 걸린 시린 사랑 길 잃을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지나가는 저 여자
끌어당기지 않아도 늘어난 석양처럼 눈자위가 붉다

참 난처해라
오늘도 어제도 끝내 터뜨리지 못하고
입속에 차오르는 이름으로 침이 한가득 고이는지

그림자 입에 넣고 굴리다 사리 같은 별 툭툭 내뱉는 밤

당신 참 시다, 詩다

<감상> 어째서 석류라는 녀석은 내 사랑과 똑같을까. 사랑한다는 고백 한 번 못해 보고 입속에서 그 말이 터지고, 줄 것 다 주고도 마음만은 뺏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골백번 되뇐다. 수십 년 지나 우연히 만난 첫사랑에게도 그때 좋아했다는 말을 건네지 못했다. 이런 시린 사랑 때문에 석류도 나도 어깨만 넓어지는 것일까. 끝내 터뜨리지 못하고 만 시린 사랑, 입 속에 차오르는 이름을 한밤중에 허공에다 뱉으면 별로 박히는 사랑, 이런 사랑을 글로 쓰면 바로 시(詩)다. 석류라는 녀석, 그 사랑은 참 쓰리지만 글로 쓰면 명시(名詩)가 될 터이다. <시인 손창기>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