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감상> 어릴 때 커보이던 느티나무와 운동장이, 커서는 너무 작게 보이는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겁니다. 순수하게 보이고 들리던 것들 다 사라지고, 이게 세상사는 이치거니 하고 아집과 오만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제 자신이 신(神)인 냥 거들먹거리다가 노인이 되어서는 어릴 적 보고 들었던 것들이 다시 찾아옵니다. 누구나 “구름에 달 가듯이” 초탈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받아들이기에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아름다움을 수용하고 느끼는 사람만이 귀에 들리는 것들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오감 중에 살아 있는 것이 청각이기 때문입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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