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천 경운대학교 초빙교수
한태천 경운대학교 초빙교수

10월 1일은 우리 고유의 명절 한가위다. 객지에 나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행복을 나누며, 차례상을 차려놓고 조상들에게 감사하는 날이다. 민족 대이동이란 표현에 걸맞은 인원이 고향을 찾아 대이동을 한다. 대규모 상가뿐만 아니라 재래시장까지 차례 준비를 위한 사람들로 붐빈다. 예나 지금이나 모두가 기다리는 즐거운 명절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추석은 설날과 더불어 며느리에게는 고통스러운 날이 되었고,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일상화되었다. 최근에는 시어머니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도 보편화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사회 여러 분야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 이 시점에 명절 증후군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명절이 가까워지면 한숨이 나오고 머리가 아파진단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며느리는 차례상 준비에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시간적 여유가 없는 며느리는 일찍 참석하지 못하여 시어머니 눈치 보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단다. 명절이 끝나고 나면 전국의 며느리들이 몸살을 앓는단다. 명절이 되면,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한숨이 나온단다. 며느리에게 어디까지 요구를 하는 것이 옳은지, 자신이 어디까지 해주는 것이 옳은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단다. 준비하느라 힘들고, 며느리 눈치 보느라 스트레스 받는 단다. 친손주 외손주 다 다녀간 텅 빈 방에 누우면 온몸이 들쑤시고 아프단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는 이 현실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시대가 바뀌고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문화도 바꾸어야 한다. 언젠가부터 설빔, 명절빔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빔이란 명절에 입기 위해 헌 옷을 말끔히 고치거나 새로 장만한 옷 또는 신발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용어가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듯하다. 생활 수준이 높아져 평소에 새 옷을 바꾸어 입으니 명절이라고 특별히 빔을 마련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명절빔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는 완전히 사라졌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농촌 이탈이 많아졌을 때, 많은 어르신은 젊은 세대를 바라보며, ‘앞으로 성묘는 없어지고, 조상 무덤은 풀밭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나 교통의 발달과 승용차의 증가로, 젊은 세대들은 걱정하던 어르신 세대보다 더 자주 성묘를 하고 더 깨끗하게 조상 묘를 가꾸어 왔다.

이제 좀 벗어나자. 명절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도록 하자. 탈 명절화 하자. 명절 때 온 가족이 모여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은 우리네 전통적 문화유산이지만, 문화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여야 한다. 과거 교통이 불편하던 시대,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 사람은, 명절이 아니면 고향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전국은 일일생활권으로 좁혀졌고 승용차를 소유하지 못한 가정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고향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만 있으면, 영상통화로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볼 수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사회가 급변하고 있는 이때, 코로나19 확산 차단을 위해 고향 방문을 삼가자고 모두가 우려하는 엄중한 이 시점에, 핑계 삼아 명절 문화를 바꾸자. 부모님은 객지 생활하는 아들 며느리에게 “야들아! 며칠 집에서 푹 쉬어라!”라고 배려하자. 아들 며느리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편안하게 쉬시도록 하고, 평소에 더 자주 찾아뵙자. 시어머니가 누군가의 천금 같은 딸이었듯, 며느리 또한 누군가의 천금 같은 딸이었다. 시어머니의 천금 같은 딸은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아가고 있다.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딸들은 명절만 되면 힘들어한다. 딸들이 편안한 명절 문화를 만들자. 딸들이 편안한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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