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어릴 때 본 탑(여러 층으로 또는 높고 뾰족하게 세운 건축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중에 지금까지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구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 시비(詩碑)입니다. 정확히는 탑이 아니라 비이긴 합니다만 그냥 탑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검은 돌에 아이의 필체로 음각된 ‘나의 침실로’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우정 그 시비를 찾아본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공원 앞에서 가게를 하던 아버지가 그 아래에 노점을 차린 것입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비에 새겨진 시를 읽게 되었습니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때 제가 뜻 모르고 ‘안고 궁글었던’ 것이 바로 유명한 시였다는 것을요. 그리고 또 한참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왜 하필이면 그 대목이 시비에 새겨져야 했던가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저 같은 시(詩) 무식쟁이에게도 그런 날이 오는 것이겠지요.

어릴 때 접한 상화시비가 저의 문학인생에 음으로 양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합니다. 그 전 해에 교내 백일장에서 처음 입선의 기쁨도 누렸으니 그 뜻 모를 말씀들이 모르긴 해도 큰 격려가 되었으리라 추측합니다. 글 쓰는 자는 (누구든) 안고 (어디로든) 떠나는 자라고 배웠지 싶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교인 대구수창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미국건축원조기념비’입니다. 6·25 동란 중에 미군이 학교 부지를 부대 막사로 사용한 모양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면서 근사한 학교 건물을 하나 지어서 선물했습니다. 지금은 헐려서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그 교사(校舍)가 꽤나 웅장했습니다. 3층짜리 짙은 회색 콘크리트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빛나는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 뿌듯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 건물이 미군이 지어준 것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정문 옆에 우뚝 서 있던 그 탑이 그것을 기념한 것이라는 것도 몰랐고요. 얼마 전 짬을 내서 모교를 찾았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만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후문이 정문이 되어 교문의 위치도 완전히 바뀌고, 남향 건물에서 북향 건물로 본관의 위치가 바뀌면서 교사와 운동장이 서로 위치를 바꾼 상태였습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 들어온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옛날 건물은 딱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 무렵 지어진 신관 건물(지금은 부설 유치원 건물)이 그것입니다. 그때는 꽤 큰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아담한 모습입니다. 미국건축원조기념탑은 꽁꽁 숨어 있었습니다. 옛 정문이 폐문이 되면서(차량 출입은 불가능한 쪽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옆에 있던 탑이 본관 건물 뒤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밖에서 보면 전혀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모양도 누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당당했던 옛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제야 ‘미국건축원조기념비’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완연히 애물단지였습니다. 그 탑 때문에 주변 정리가 안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본 두 탑을 회고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요즘 들어 상화시비에서 읽은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와 어느 소설에서 읽은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는 근본적인 수치심 속에 하나다”라는 구절이 자주 생각나서입니다. 탑도 아마 그런 마음에서 세우는 것이라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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