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담의 난부터 외세 침략까지 천년신라 지켜낸 '최후의 보루'

복원공사 중인 명활산성 북문.

경부고속도로 경주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산업로를 타거나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분황사 옆구리를 끼고 돌아오거나 간에 보문관광단지로 들어가는 길은 경감로 하나다. 길은 보문관광단지 앞 보문삼거리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는데 왼쪽이 보문단지를 관통하는 보문로다. 경감로는 오른쪽으로 꺾어 보문호를 휘감아 나가다가 감포읍 전촌 삼거리에서 해안로를 만나 역할을 마감한다. 보문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보문호를 휘감아 가는 길은 호수와 호수 건너편 보문관광단지가 그림 같이 펼쳐지는 드라이브 명소다. 보문호를 끼고 이 길과 나란히 전개되는 산이 명활산이다.

명활산성 동쪽 성벽 위에서 바라본 보문단지 유선장 선착장.

명활산은 보문동과 천군동에 이르는 높이 245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신라인들에게는 신령스런 산이었다.

명활산성에서 바라본 경주 시가지.

‘삼국유사’의 ‘신라시조 혁거세왕’이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지금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인데 촌장은 지타(祗沱)이다. 처음에 명활산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岐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됐다. (중략)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는 금강산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명활산성 내부.

‘산부재고 유선칙명(山不在高 有仙則名),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명산이다’(당나라의 시인 유우석의 시 ‘누실명’)이라 했던가. 진한 사로국 6부 시절에 6촌장 가운데 두 사람이 명활산에서 탄강했거나 살았다. 배씨의 시조 지타는 하늘에서 명활산으로 탄강해 왔다가 금산 가리촌으로 가서 그곳의 촌장이 됐다. 호진은 설씨의 시조인데 금강산으로 탄강했다가 명활산 고야촌에 자리를 잡았다.

자비왕 시절 군사 1000명이 주둔했다는 천군동의 삼층석탑.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명활산은 신라인들의 존숭을 받았다. 신라는 왕경 분지를 둘러싼 동서남북 중 5개의 산을 왕경 수호의 천연 요새로 보고 신산(神山) 영악(靈岳)으로 숭배했다. 이를 ‘왕경오악’이라고 한다. 중악은 낭산, 서악은 선도산, 남악은 남산, 북악은 금강산, 동악은 토함산으로 꼽고 있다. 그런데 학계 한쪽에서는 토함산이 왕경과 너무 떨어져 있는 데다 통일신라시대 광역단위의 오악이었다는 점을 들어 동악을 토함산 대신 명활산으로 꼽기도 했다. (‘신라왕경오악연구’, 경주시·경북대학인문과학연구회 발간) 이 책은 특히 국가 대소사를 논의하던 장소인 4령지 중 동쪽의 청송산을 명활산으로 봤다. 신라는 1년에 6번 제사를 지냈는데 입춘쯤에 명활성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제를 지낼 정도로 이 산을 신성시했다. ‘신선이 살면 명산’이라는 유우석의 시만 본다면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산임에 틀림이 없다.

황룡골짜기에서 덕동댐을 거쳐 보문호로 흘러드는 북천.

명활산은 국방 요새이기도 했다. 신라는 역사 이전부터 왜구들의 노략질에 골머리를 앓았다. 왜구들은 장기 감포 대본 등 동해안을 거쳐 왕경으로 진격해왔다. 명활산성까지 오는 루트는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있는 ‘신문왕 왕의 길’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해안에서 대종천 깊숙이 배를 타고 들어온 뒤 기림사에서 추원마을까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장례를 치르던 길, 지금의 ‘왕의 길’을 되짚어 왔을 것이다. 그 경우 대규모 접전은 명활산성에서 펼쳐졌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명활산성 동쪽 성벽에서 보면 보문호와 보문관광단지, 천군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왕경으로 들어가려는 왜구를 막는 길목으로 최적지였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왜구와의 명활산성 전투를 촘촘히 기록하고 있다. 406년(실성이사금 4) 왜병이 쳐들어와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431년(눌지마립간 15)에 왜병이 쳐들어왔다가 명활산성을 넘지 못하고 물러났다. 좀처럼 명활산성을 깨뜨리지 못했던 왜구들이 459년 (자비마립간 2년)에는 명활산성을 뚫고 왕경 시가지까지 쳐들어왔다. 왜구들이 월성을 에워싸고 전투를 벌였다. 사방에서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했다. 왜구들이 물러갔으나 신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왕경은 쑥대밭이 됐고 왕궁이 함락될 위기에 빠졌으니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을 터다. 그 후에도 왜구들의 공격이 계속됐다. 자비마립간은 명활산성을 수리하고 475년 아예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월성에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명활성에서부터 왕이 직접 왜구의 공격을 봉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488년(소지왕 10)까지 13년 동안 왕이 기거하는 거성 역할을 했다. 진흥왕 때 명활산성을 수리했는데 그때 공사 백서가 ‘명활산성작성비’다. 이 비는 1988년 우연히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에게 발견됐다. 비의 크기는 높이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이며 직사각형이다.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을 빽빽이 글자를 새겼다. 서체는 육조풍의 예의가 있는 해서체이며, 자경은 1.5∼2.5㎝이다. 작성비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진평왕 때도 명활산성을 고쳐 쌓았는데 당시는 성의 둘레가 3000보였다고 기록했다.

조선총독부 명의의 명활산성 사적 지정비.

왜구는 두고두고 신라의 골칫거리였다. 왕들은 명활성을 쌓고 고치는 일 외에도 수시로 알천 사열을 통해 군비를 점검했다. 94년 파사이사금이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한 것을 시작으로 일성 이사금과 내해이사금, 애장왕 등이 알천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왕들이 사열했던 알천은 지금의 북천이다. 대규모 군대가 무기와 군비를 동원한 상태에서 왕의 사열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알천 어디에 있을까. 명활산성의 동쪽, 보문호의 남쪽에 있는 천군동(千軍洞)이 유력하다. 천군동의 지명은 신라 자비왕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명활산성에 10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경주풍물지리지’ 김기문 지음)고 한다. 명활산성의 규모로 봤을 때 성안에 10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명활산성 앞 통일신라시대 사찰로 추정되는 천군동 사지나 그 근처 어디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명활산을 역사 속에 깊이 각인시킨 사건은 비담의 난이다. 647년 (선덕여왕 16) 상대등 이찬 비담과 염종이 들고 일어났다.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이유다. 이들은 화백회의를 열어 선덕여왕을 탄핵하고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반발했다. 비담을 반역의 무리로 규정하고 왕궁이 있는 월성을 수호했다. 비담 등은 명활산성에 진을 쳤다. 여왕파와 혁명군의 전투는 열흘이 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선덕여왕은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별똥별이 여왕파가 있는 월성 쪽으로 떨어졌다. 비담이 소리쳤다. “큰 별이 월성 쪽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여왕이 패전할 징조다” 혁명군의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왕이 이 소리를 듣고 두려움에 떨었다. 김유신은 침착했다. 깜깜한 그믐밤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하늘로 올렸다. 그리고 다음 날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퍼뜨려 군사들의 사기를 올렸다. 김유신은 백마를 잡아 제물로 바친 뒤 제문을 올렸다. 제문은 비담을 난신적자로 규정하고 하늘은 착한 이를 좋게 대하고 악한 이를 미워해 신명의 부끄러움을 짓지 말라는 내용의 명문이었다. 김유신은 곧장 명활산성으로 쳐들어가 비담 일당을 붙잡아 처형했다. 명활산성 내전 7년 뒤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다. 그가 무열왕이다. 신라왕의 진골시대를 열었고 강력한 나당 연합 체제를 구축해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했다.

명활산성은 신라시대에 축조된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으로 금성 월성과 더불어 왕이 기거했던 궁성이다. 현재 북문 복원사업과 함께 산성 둘레길을 조성 중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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