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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독립전쟁을 앞두고 만주에서 순사(殉死)한 부부
[아침광장] 독립전쟁을 앞두고 만주에서 순사(殉死)한 부부
  •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 승인 2020년 09월 17일 19시 3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18일 금요일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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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일제강점기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순사(殉死)한 사람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 혹은 남겼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1919년 독립전쟁을 준비하다가 신흥무관학교에서 병사한 배재형과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난 아내 김씨부인도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배재형(裵在衡·1894~1919)은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출신으로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그의 25년 자취에서 부친 배인환(裵仁煥·이명은 배인택)의 영향력을 빼놓을 수는 없다. 부친 배인환은 1909년 5월 설립된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참가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이끌던 이상룡 등 경북의 독립운동가들이 1911년 만주로 망명하자, 배인환도 이듬해 1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의 일가가 처음 정착한 곳은 길림성 통화현 을밀(乙密)이었다. 부친 배인환은 주로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1914년 합니하(哈泥河) 청구자(靑溝子)로 옮겨가 동진학교(東進學校)를 세웠으며, 이듬해에는 마록구에서 협창학교(協昌學校)를 설립했다. 배인환은 두 학교에서 교감으로 활약하였다. 그사이 신흥중학교를 졸업한 아들 배재형도 이곳 협창학교에서 교원으로 활동할 만큼 성장하였다. 이어 1917년 배재형은 병영의 성격을 지녔던 마록구농장(馬鹿溝農庄) 운영에 참여했으며, 1918년에는 고산자(孤山子)로 옮겨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배재형은 만주 망명 7년만인 1919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겨우 25세의 나이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 김씨부인도 그를 따라 곧 자결하였다. 김씨부인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출신으로, 의성김씨 김익모(金益模)의 딸이다. 남편 배재형이 병들자 극진히 간호하였다. 살림이 어려웠던 터라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이 결국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삭이며 장례를 치렀다. 장례가 끝난 뒤 김씨부인은 시동생에게 집안일을 부탁하고, 연로한 시모와 시동생을 위해 마지막 옷을 지었다. 이어 자신의 임종 채비까지 마친 뒤 음식을 끊기 시작했고, 단식 18일 만에 절명하였다. 김씨부인이 단식·절명하자 동포사회를 이끌던 자치단체 한족회는 1919년 6월 6일 ‘포열장(褒烈狀)’으로 그 뜻을 기렸다. 김씨부인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포열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담겨 있다.

“故 학생 배군 在衡의 처 의성김씨가 남편의 병이 심할 때에는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흘려주고,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울지도 곡하지도 않고, 老시모의 가르침을 받아 집안일을 유지하며 시동생을 권면하여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고 하고, 슬픔을 참고 고통을 이기며 老시모와 시동생의 옷을 손수 만들었다. 또 이어 자기의 임종 채비를 하고, 18일간 음식을 끊어 죽었다. 이는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고, 孝烈을 온전히 이룬 것이니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에 공로가 嘉賞하여 棺材 일부와 銘旌 일구를 특히 포사함”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남편과 함께 순사했던 김씨부인의 행적은 한족회의 표현처럼 “목숨을 버려 의(義)를 취하고, 효열(孝烈)을 온전히 이룬 전무후무한 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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