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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사과(謝過),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아침광장] 사과(謝過),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승인 2020년 09월 23일 17시 17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24일 목요일
  • 1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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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606년,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Henri IV)는 측근인 아르망 장 뒤 플레시(Armand Jean du Plessis)라는 젊은 하급 귀족에게 뤼쏭(Lu?on) 교구의 주교(主敎)직을 맡기고자 하였다. 하지만 25세 이상의 성인만 주교가 될 수 있다는 가톨릭 교회법으로 인해 당시 21세였던 뒤 플레시는 이 자리에 임명될 수 없었다. 그러자 뒤 플레시는 로마로 직접 가 교황 바오로 5세(Paul V)를 알현, 자신은 사실 25세가 맞는데 행정적 착오로 인해 21세로 잘못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주교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교황이 특별허가를 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의 주장대로 문서상의 실수가 있었다고 판단한 바오로 5세는 요청받은 대로 그 자리에서 특별허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허가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 플레시는 갑자기 교황 발 앞에 엎드러졌다. 그리고 사실 자신은 21세가 맞는데 이 주교직을 너무 받고 싶어서 거짓을 고하게 되었다고 실토하고, 교황이 자신의 죄에 대한 고해성사(告解聖事)를 듣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새파랗게 젊은 청년의 당돌함과 배포에 어안이 벙벙해진 바오로 5세는 ‘잔머리 굴리는 것을 보니 크게 출세하겠다’라고 하며 헛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 청년이 훗날에 온갖 중상모략과 암살음모를 헤쳐 가면서 프랑스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절대왕정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명작 『삼총사』에까지 등장하게 된 그 ‘악명높은’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이다.

정치인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일단 거짓말이나 막말을 쏟아낸 후 나중에 사과를 함으로써 상황을 종결하려는 행태는 물론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여의도발(發) 경거망동과 이에 따른 유감 표명이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을 도배했다. 국방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여당 원내대표를 지낸 한 의원이 군 출신 야당 의원들을 ‘쿠데타 세력’으로 지칭했다가 곧바로 유감을 표했고, 같은 당의 또 다른 의원은 법무부장관의 아들의 군 복무 시절 특혜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한 당직 사병의 실명을 공개하고 그를 ‘단독범’이라고 지목한 지 하루 만에 사과하였다. 카투사 자체가 편한 곳이기 때문에 법무부장관의 아들과 관련한 논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발언한 또 한 명의 여당 원내대표 출신 의원도 바로 다음 날 용서를 구했고, 여당 원내대변인 또한 법무부장관의 아들이 안중근 의사의 말을 실천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반나절 만에 유감을 표했다. 야당 원내대표의 연설이 한 인터넷 뉴스 포털의 메인에 곧바로 올라왔다는 이유로 포털 관계자들을 압박하고자 하는 문자를 보낸 청와대 수석 출신의 여당 의원은 결국 고개를 숙였고, 총선 당시 무려 11억원 상당의 재산 신고를 누락한 것이 밝혀진 야당 의원도 송구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누가 봐도 상당한 문제의 소지가 될 것이 뻔한 말과 행위가 소위 경륜 있다는 국민의 대표들로부터 쉴 새 없이 터져 나왔고, 이들의 릴레이식 사과 행렬이 이제 식상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것은 필자만의 기분만이 아닐 것이다.

청년 리슐리외가 애초부터 교황에게 사죄를 할 계획을 품고 자신의 거짓말을 밀어붙였던 것처럼, 자신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결국 사과와 유감 표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석한 의원들이 진정 모를 정도로 상식이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과가 뒤따를 수밖에 없는 망발을 해서라도 유권자들의 기억 속에 각인이 되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일단 저질러본 후 상황을 봐서 나중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내뱉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한없이 엄중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할 대국민 사과를 남발하는 그들의 ‘가벼움’ 뒤에는, 그들을 쉽게 용서해주고 쉽게 잊어주고 쉽게 뽑아주는 국민의 ‘가벼움’에 대한 비웃음이 숨겨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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