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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오디세이] 14. 선도산
[삼국유사 오디세이] 14. 선도산
  •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 승인 2020년 09월 23일 18시 4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24일 목요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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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빌고 신과 소통했던 성산…신라인들의 영원한 '서방정토'
선도산마애삼존불.

경주에서 선도산은 해가 지는 산, 서산이다. 남산 자락의 창림사지 삼층석탑 옆에서나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너머로 보는 서산 일몰이 황홀하다. 황룡사지 빈 들이나 내물왕릉 뒤로 넘어가는 해넘이도 장엄하다. 2천년 전에도 1천년 전에도 선도산의 일몰은 그렇게 황홀했을 것인데 그 때는 이 산이 산신이기도 하고 서방정토이기도 해서 숭고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산을 올라간다. 신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감모여재(感慕如在)하는 마음으로 산길을 간다. 김유신장군 배향하는 서악서원, 무열왕, 진흥왕 등 영웅들의 무덤을 지나 서악동 삼층석탑 앞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해발 390m.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면 약 30분쯤 걸어 정상에 오르는 낮은 산이다. 정상 못 미쳐 굽잇길에서 경주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정상 아래 마애삼존불 앞에서는 남산과 내남 들판이 그림같이 펼쳐지는 경쾌한 산행코스다.

선도산에서 본 나정과 창림사지.

신라인들에게 선도산은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신전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의 지침을 얻는 ‘신탁’에 의존했다면 신라인들은 소망을 현실화하는 ‘발원’으로 신과 소통했다. 불교가 도입되기 전에는 선도성모를 산신으로 모셨고 불교가 도입된 뒤에는 이 산을 서방정토로 여기며 신성시했다. 신라왕경 5악 중 서악으로 정하고 국가제사를 모시는 신성한 곳이었다. 또 백제의 침입을 방어하는 서형산성이었다.

선도산에서 본 경주시가지.

무엇보다도 선도산 자락에 들어선 영웅들의 무덤이 주는 웅장한 분위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무열왕,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 진흥왕,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법흥왕, 당대 최고의 외교관 김인문, 삼국사기 열전에 이름을 올린 김양의 묘가 이곳에 있다. 옛사람들은 생전에 죽을 자리를 미리 정해두었는데 이를 신후지지(身後之地)라고 한다. 신라의 영웅들은 왜 선도산 자락을 신후지지로 택했을까. 그것은 역시 앞서 말한 대로 성모산신이 주관하는 성산이고 서방정토이며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선으로서의 산성이었기 때문이다.

선도산 정상.

선도산의 주인은 신라이전부터 선도성모 사소(娑蘇)다. 사소는 중국 황제의 딸이다. 일찍이 신선술을 터득해 신라 땅에 온 뒤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았다. 황제가 걱정이 많았다. 솔개의 발에 편지를 매달아 딸에게 부쳤다. 편지는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어라’는 당부를 담고 있었다. 솔개를 날렸더니 서라벌의 서쪽 산에 머물렀다. 사소가 이곳을 집으로 삼고 지선(地仙)이 됐다. 이 산이 선도산(仙桃山)이다.『삼국유사』를 간추려 본 내용이다.

선도성모정령을 모신 성모사.

‘선도’는 도교와 관련된 이름이다. 옥산 혹은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는 한무제에게 3000년에 한번 생기는 과일을 주었는데 그것이 선도이다. 크기는 오리알만 하고 둥근 청색이며 먹으면 감미로운 맛이 입안에 가득한 불로장생 과일이다. 그 에피소드를 가져왔다. 선도성모는 신라의 서왕모 격인 셈이다. 왕경 오악 중 서악이라고도 하고 서술, 서형이라고도 한다. 솔개가 머문 서쪽 산이라는 뜻으로 서연산(西鳶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는 사소가 동쪽, 그러니까 신라에 온 까닭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김부식은 1116년(예종11) 이자량을 정사로 하는 송나라 사행단에서 문한으로 동행했는데 그때 송나라 관리 왕보의 안내를 받아 어느 사당에서 선녀의 화상을 보게 됐다. 그때 왕보가 “옛날 어느 제왕가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해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곧 바다를 건너 진한에 도착해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고 그녀는 지선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서 살았답니다. 이것이 그녀의 화상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선도산 초입에 있는 서악리 삼층석탑.

『삼국유사』대로라면 사소는 신선술을 펼치기 위한 활동무대로 서라벌 땅을 개척해온 셈이 되고 『삼국사기』 기록에 무게를 싣자면 외간 남자와 사통을 한 뒤 임신을 하자 남의 눈총을 피해 서라벌로 도피를 왔다는 말이 된다. 이로써 박혁거세는 서악에서 선도성모의 몸에서 나왔다는 설과 남산 양산 나정에서 탄생했다는 두 계통의 탄생설화를 가지게 됐다. 사정이야 어쨌거나 사소는 선도산 신모, 선도성모 등으로 추앙받게 됐다. 선도산은 신라 왕경 오악 중 서악이었고 국가 제사를 지내는 삼사 중 24개 소사의 하나로 예우를 받았다. 선도성모의 정령은 산 정상 아래 아미타 삼존불 옆 성모사에 모셔져 있다. 성모사 아래 동쪽으로 350m 지점 암벽에 성모구기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서정주 시인의 ‘꽃밭의 독백’이 신라로 오기 전 황제의 딸 사소의 이야기다. 서정주는 그녀에게서 출가 전 석가모니를 보았던 모양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에서 그녀가 서라벌에 온 까닭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법흥왕 이후 불교가 공인되자 선도성모설화는 불교와 손을 잡는다. 그 역사적 사실을 설명해주는 대목이 『삼국유사』 ‘선도성모수희불사’편이다. 진평왕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안흥사(安興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살림살이가 어려워 고민에 빠졌다. 어느 날 꿈속에 예쁜 선녀가 구슬 보옥으로 치장하고 와서 말했다. “나는 선도산 신모다. 네가 불전을 중수하려 하니 기쁘도다. 그래서 황금 10근을 시주하여 도우려 하니 내가 앉은 자리 밑에서 황금을 취하라. 그것으로 주불 삼존상을 장식하고 벽 위에 53불과 육류성중과 제천신과 5악(五岳) 신군을 그려서 매년 봄 가을 두 계절의 10일에 선남선녀를 모아 일체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풀어 영원한 법규로 삼아라”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완벽한 ‘컬래버레이션’이다. 신모는 비구니에게 자기 소유의 금을 내주고 불사를 일으키는 한편 자신을 포함한 5악의 산신을 챙기도록 함으로써 불교와 재래종교간의 협치를 이뤄냈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서악을 서방정토로 여겼다. 서악은 왕경에서 보면 해가 떨어지는 곳이다. 붉게 물드는 성산을 보며 한없는 외경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 마음을 그대로 모아 형상화한 것이 선도산아미타삼존불이다. 선도산 정상 아래 남쪽 절벽에 6.85m의 거대한 마애불상을 새겼다. 아미타여래입상은 머리 눈 귀가 다 떨어져 나갔고 코와 입 턱만 남아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과 오른쪽의 대세지보살도 훼손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돌을 끼워 맞춰 형상을 유지했다. 깁스하고 철심을 박은 인간하고 비슷하다.

서악은 신라인들에게 신령스러운 곳이기도 하지만 대박을 터뜨리는 희망산소 같은 곳이기도 했다.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 보희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는데 서울을 가득 채웠다. 꿈은 보희가 꿨는데 ‘로또는 동생 문희가 맞았다. 그 꿈을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고 샀다. 열흘 뒤 문희는 김춘추와 만나 정을 통한다. 가야에서 신라에 복속돼온 김유신이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기 위한 일종의 미인계였다. 김춘추가 왕이 되면서 문희는 문명왕후가 된다. 김유신은 선덕여왕 때 일어난 비담의 난을 제압하면서 국가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영웅이 됐다.

호랑이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누고 서악에 왔다가 대박을 터뜨린 남자도 있다.『삼국유사』 ‘김현감호’편에 나오는 김현이 주인공이다. 정월대보름날 흥륜사에서 탑돌이 하다가 처녀와 눈이 맞아 정을 나눴다. 처녀의 집이 있는 서악까지 가보니 처녀는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다음날 서울에 나타나 소란을 피우고 김현이 호랑이를 잡아 공을 세워 벼슬길에 올랐다. 김현이 호랑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절을 세웠는데 호원사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글·사진= 김동완 역사기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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