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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단] 레이턴시
[아침시단] 레이턴시
  • 강백수
  • 승인 2020년 09월 24일 16시 45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25일 금요일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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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늘에 떠 있던 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 버린 별들의 유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했다
먼 옛날 먼 바다에 누가 빠져 죽을 때 태어난 파도가
그제야 발치에 닿기 시작했다

너는 뭐라 말을 하는데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했다
서로 등을 돌린 채 잠이 들었던 밤에
진작에 닿았어야 했을 말들은 여정을 떠났다

숨막힐 듯 느리고 낮게 말이 기어오는 동안
등과 등의 간격은 은근하게 멀어지고
그 사이로 낯선 바람이 불었다

어째서 너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어느 날에야
그 섬에서 네가 했던 말이 도착했다
대답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른 키스를 했다

한참을 멍하다가 한 시절이 지나다가
그제야 나는 문득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시각 먼 바다에는 또 누가 빠져 죽고
어느 별은 유서를 쓰고 있었다

<감상> 레이턴시(latency)는 자극과 반응 사이의 시간을 가리킨다. 지금 바라보는 별들은 먼 과거의 빅뱅에서 비롯된 것이고, 발치에 닿는 파도는 누가 빠져죽은 후 태어난 것이다. 현재의 빈곤과 억압과 비리와 불평등이 먼 과거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고, 눈앞의 이익을 좇아 개혁을 외면하는가. 느리고 낮고 진정성을 가진 말들을 외면하고, 선동적인 말들에 귀가 솔깃해지는가. 애정 어린 말들은 섬처럼 떠돌거나, 유성처럼 사라지기도 했다. 그 말들 잡지 못해 고함을 지르고, 내 대답은 허공에서 맴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입맞춤만으로 시간을 당겨 한순간을 잡을 수 있을까. 진실된 나의 유서는 어느 별로, 어느 바닷가의 파도로 떠돌고 있을까.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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