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의 '흔적과 문화' 보존해 후대로 이어주다"

정희웅 어르신이 전민욱 해설사에게 선원리 마을에 대한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권오석 기자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과 고을에는 각각의 전통과 문화가 담겨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 이 시점에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정신과 전통, 정겨운 마을의 흔적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옛날부터 오랜 세월 살아오며 조상들의 삶의 흔적과 문화가 서려 있는 전통마을은 그 자체로 소중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사라져 가는 고향의 문화, 전통마을을 알아보고 가꾸며 보존해 후대에 이어줄 의무가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전민욱 영천관광문화해설사와 1600년대 초부터 400여 년 간 영천의 대표적 부락인 임고면 선원마을을 둘러봤다.

코스모스 뒤편에 아늑한 한옥과 대나무 숲이 보인다.

임고면의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이었던 선원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요산 정호례(鄭好禮) 선생이 터를 잡고 자손들과 영일 정씨들이 모여 살기 시작해 150호가 넘는 집성촌으로 자리를 잡았다.

선원리는 동쪽과 남쪽으로 자호천(紫湖川)이 흐르고, 북으로는 덕연리, 서로는 화남면, 남으로는 양항리, 서로는 평천리와 접경을 이룬다.

산수의 경치가 무척 아름다우며 높이 200여 m의 학산(鶴山)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조선 인조 때 벼슬에서 물러난 정호례 선생이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유해 선원이라 부르며 정착했다고 한다.

선원2리 뒷산의 언덕이 고리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다고 해서 환고(環皐) 또는 대환(大環)이라 부르고 있으며 보물 513호로 지정된 철불좌상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또 송고헌이라 불리던 정연감 가옥은 현재 전통 찻사발을 만드는 도곡요(陶谷窯)가 있으며 선원2리에서 1리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근래에 지은 학초고택(鶴樵古宅)이 있다.

이외에도 선원마을의 유래를 기록한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의 선원기(仙源記)가 남아 있다.

전민욱 해설사의 간략한 설명과 함께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농촌마을 100선’에 선정된 선원리 큰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아늑한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먼저 마을 다리를 건너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0호인 ‘함계정사(涵溪精舍)’가 눈에 들어왔으며 입구에는 사랑을 뜻한다는 연리지 나무가 우리를 반기듯 우두커니 서 있다.

이어 전 해설사와 함께 마을 돌담길을 돌며 전통 찻사발을 만드는 도곡료 가옥과 마을 안쪽에 위치한 ‘동연정’ 정자와 국가지정민속자료인 연정고택 정용준 가옥 등을 둘러봤다.
 

함계정사 전경

△함계정사(涵溪精舍).

임진왜란 때 영천의병장 호수 정세아 선생의 현손인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 1660-1720) 선생이 숙종 28년 학문을 강화하기 위해 정자 건립을 시도했으나 재력이 부족해 우선 안락재(安樂齋)라는 소재(小齋)를 건축했다.

그 후 정조 3년 선생의 손자인 죽비(竹扉) 정일찬(鄭一鑽 1724-1797) 공이 중건해 함계정사를 창건했다.

선생은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며 인품과 덕망이 높았으며 병와 이형상 선생과 학문을 강론하면서 일생을 보낸 성리학자로 가례학문 등 문집이 남아 있다.

임고면 선원마을 입구 작은 언덕 위에 정사가 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남쪽의 언덕 아래에 소계(小溪)가 있으나 지금은 사과밭에 편입이 되어 유수(流水)는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옛 물줄기를 따라서 자갈줄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동연정.

△동연정(東淵亭).

선원마을 가운데에 인공 연못과 잘 어울리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동연정이다.

이 건물은 정조시대 학자로서 어릴 때부터 총명한 지혜로 학문에만 전력하고 인격을 도야하여 타인의 규범이 되었던 정백휴(鄭伯休 1781-1843) 선생을 추모해 후손들이 건립했다.

건물 앞에는 연못을 파서 조형을 꾸미고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연정고택 정용준 가옥.

국가지정중요민속자료 문화재 107호로 넓은 대지에 연당이 있는 이 가옥은 연정 정일능의 호를 따 연정고택이라 불리며 1756년에 지었다고 전한다.

특히 연정고택은 정일휴와 일능,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며 집 앞 개울가에 있는 연정(蓮亭)은 쌍둥이 형제의 우애와 정을 기려 연을 심은 작은 못이다.

연정은 마당가를 굽어 흐르는 작은 개울가에 있는데 건너편 언덕에 노송과 잡목들이 들어차 있으며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소리 내어 흐르므로 깊은 산골과 같은 정취를 돋운다.

본채와 정자의 합리적인 구성과 개울을 막은 연못의 존재는 주인의 자연애와 운치스러운 생활관, 인생의 지혜를 잘 나타내주는 향원유적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고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2006년 조근식 감독의 이병헌과 수애 주연 영화 ‘그해 여름’ 촬영지로 선원리의 아름다운 풍경과 연정고택 그리고 연정이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됐다.

이외에도 정조시대의 학자이며 행의가 덕순하고 역학매진하여 추앙을 받던 정천휴(鄭川休) 선생을 추모해 후손들이 건립한 동연정과 흡사한 구조를 가진 경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또 조선 숙종시대 문관으로 통덕랑 관위에 오른 정중보(鄭重簠) 선생을 추모해 세운 송원재(松源齋), 조선 고종시대 학자이며 사상가로 향내를 대표해 무분별한 서양문물의 유입을 억제하고 자주적인 민족주의를 주창한 정치구(鄭致龜 1824-1901) 선생이 은거하던 학파정(鶴坡亭), 충이당(忠怡堂), 환고정사(環皐精舍), 학초고택(鶴樵古宅), 선원약수, 동제나무와 암수바위 등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마을 뒤편에는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있는 요산 정호례 선생 등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또 형제와도 같은 옆 마을 선원2리에는 보물 제513호인 선원동 철불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로 추측되는 웅대한 한 고찰이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리고 주인 없는 철불좌상만 길가에 버려진 채 있었다.

수백 년이 흐른 1860년경 정진수라는 사람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나는 이 근처에 있는 부처인데 머리가 차라와 견딜 수가 없으니 바라건대 눈비만 피할 정도로 신경을 써준다면 그대의 은공을 갚겠노라!”라는 말에 그 자리에 가보니 정말 부처의 머리가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

이에 그는 주위를 깨끗이 정리한 뒤 작은 오두막을 지어 눈비에 맞지 않도록 했고 그 후 부처의 은덕으로 8대 독자로 내려오던 집안에 손자 4형제를 얻었으며 가난했던 살림이 점차 늘어나게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불상은 현재 불신(佛身)만 남아 있으며 두 손이 없어졌고 주조(鑄造) 후에 때움한 흔적이 곳곳에 있을 뿐이며 고려 전기의 양식을 대변해주고 있는 우수한 철불상으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7호 환구세덕사는 본래 호수 정세아 선생의 후손들이 환구위에 서재를 지어 문중 자제들의 강학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후손들이 임진왜란에서 영천지역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호수 정세아와 그의 아들 백암 정의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1년(1777) 서재 뒤에 충현사를 지어 향사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해왔다.

그 후 1784년 백암 선생의 충효정려각(忠孝旌閭閣)으로 충효각이 사당 좌측에 세워졌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거되었고 현재는 충효각과 부속사만 남아 있다.

선원2리 마을은 고요한 가운데서 새소리를 들으며 인근에 위치한 충이당과 창의문을 비롯해 두루봉, 성짓곡, 천왕미기 등을 통해 옛 풍습과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전민욱 해설사는 “영천은 골벌국이라는 부족국가 형태에서 신라,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태종(1414년) 때 영천이라는 명칭과 함께 오늘에 이르고 있다”며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과 전통, 정신을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무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한옥으로 지어진 고택들은 사람 손 떼가 묻고 계속 호흡하지 않으면 10년 내에 허물어진다”면서 “선조들의 소중한 자산을 잘 가꾸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체험마을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 우리의 전통문화를 살려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원마을의 터주대감인 정희웅(79) 씨는 “태어나서 지금껏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마을은 학이 날개를 펼치고 감싼 무릉도원 같다는 뜻에서 선원이라 불린다”며 “400여 년 전부터 터를 잡은 영일 정씨 집성촌으로 유서 깊은 역사와 많은 문화재가 있는 전통 깊은 마을이다”고 자랑했다.

특히 “선원리는 의롭게 살아오신 조상들의 유지를 받들어 예를 중시하고 근면 성실하게 살아 학문과 부가 번창한 마을이었다”면서 “누구보다 마을에 대한 애착이 많고 우리 마을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고 뿌듯해 했다.

정영호(70)씨는 “조상 때부터 4대째 고향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여기는 모두 10촌 이내 집안사람들이 살았고 한 성씨가 이렇게 오랫동안 큰 마을을 이루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며 “예전 1000여 명에 가까운 일족들이 모여 서로 아껴주고 챙겨주며 살 때가 좋았고 그립다”고 회상했다. 또 그는 “지금은 뿔뿔이 흩어지고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번 음력 10월 첫 번째 일요일 100여명의 자손들이 모여 묘사를 지내고 있어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이제는 나이들은 일족 사람들만 마을을 지키고 있다”면서 “문화재가 많은 우리 전통마을이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에 작은 소망이 있다면 임고서원~환구서원을 거치는 한옥전통 관광벨트를 만들어 선원마을이 없어지지 않고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소원했다.

권오석 기자
권오석 기자 osk@kyongbuk.com

영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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