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가을볕 속으로 빨래가 물기를 털어내는 걸 바라보면서
그러고도 내 습진을 내다 말릴 수 있게 넉넉함이 남아도는 이 볕이 좋고
헛헛한 위장 속으로 수제비를 같이 흘려 넣을 가난한 식구가 있어 좋고

볕이 처마를 오지게 지지는 오후가 되어서는
늙은 염소처럼 우물거릴 수 있는 햇고구마가 있어 좋고
오늘은 큰놈에게 안경 해줄 돈이 품에 넉넉히 있으니 더욱 좋고

그러고도 더 좋은 건
일생에서 가장 높고 맑은 날 중의 하나인 오늘이
아직도 이마 위에 두둑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감상> 처서는 가을로 가는 문턱이니, 잔잔한 바람이 부는 잔풍(殘風) 날씨와 넉넉한 햇살이 있어 좋다. 나아지지 않는 삶의 지난함도 햇살을 받으면 따듯한 마음으로 묻어올 것 같다. 삼시세끼를 채울 수 있고, 내 많지 않은 월급을 받는 것만으로 고마울 때가 많다. 이 가을에 식솔이나 다른 이에게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가을에 사랑할 수 있는 고운 사람이 온다면 더욱 좋겠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 백석(白石) 시인처럼 그냥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을 같이 맛보고 싶을 뿐이다. 외롭고 높고 맑은 나날들이 많이 남아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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