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몇 년 전 수능모의고사에 나온 시 한 편의 해석을 두고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시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정작 이 시를 쓴 시인 본인은 정답을 내지 못한 것입니다. 누가 그 문제를 sns에 올렸기에 저도 한 번 풀어보았습니다. 역시나 시인과 동일한 오답(?)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도된 문학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상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숙고하게 만들어주는 계기였습니다.

시(문학)는 상징(象徵)입니다. 상징으로 이루어지고 그 자체가 상징이 되는 존재입니다. 당연히 시(문학)의 창작과 해석에는 상징적 상상력이 작용합니다. 상징도 기호의 일종이기에 항상 자기 아닌 다른 그 무엇(사건이나 사물이나 관념)을 표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상징을 상징으로 보지 않고 단순 신호(信號)로 보는 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호를 위한 언어적(회화적, 음악적) 부호로만 취급되면 상징의 생명은 거기서 끝이 납니다. 문학(예술)이 비문학(비예술)이 되는 거지요. ‘시인도 모르는 시의 해석’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문학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참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문학(상징)을 모르는 이들이 문학작품을 판관적(判官的) 자세로, 비문학적으로, 가르친다는 게 너무 끔찍합니다. 그들이 아이들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가시험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도요.

이 지면에서 자세한 상징론을 펼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제 경험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열대여섯 살 때부터 검도를 배웠습니다. 중간중간 게으름 핀 적은 많았지만 한 번도 마음속에서 죽도를 놓은 적은 없습니다. 철들고 본격적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검도를 배울 때의 일입니다. 하루도 몸이 안 아픈 적이 없었습니다. 팔이 아프다가 나으면 다리가 아프고 다리가 좀 나으면 이번에는 손목에 무리가 오고 손목이 나을 만하면 어깨가 나가고 어깨에 힘을 빼면 다시 팔이 아프고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건강하자고 하는 운동인데 이렇게 계속 몸이 아프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이 일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한 말씀 하셨습니다. “양교수, 유명한 검도 선생이 <검도 안 하는 것도 검도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슬기로운 검도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까지 막신일호(莫神一好, 하나를 좋아하는 일보다 더 신명 나는 일이 없음), 좋아하는 운동을 중단 없이 오래 즐기고 있습니다.

“검도 안 하는 것도 검도다”라는 말은 일종의 역설(모순어법)입니다. 겉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속으로는 깊은 뜻(진리)를 전달합니다. 검도를 잘하고 싶은 열망이 높아질수록 검도를 못하게 되는 딜레마에 처해 있던 저에게는 결정적인 ‘해결적 이미지’를 제공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하는 일로 봐서는 영락없는 ‘어른이 되(게 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제 안의 여러 가지 상반되고 충돌하는 에너지들을 하나로 묶는데 요긴하게 썼습니다. 상징이란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고전 작품의 주인공, 춘향이와 심청이가 상징인 까닭도 그 때문입니다). 만들어내는 사람이나 받아서 자신의 성장동력으로 삼는 사람이나 모두 ‘어른이 되(게 하)는 상징’의 덕을 톡톡히 보는 것입니다. 이 좋은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긴 해야겠는데 그게 참 어렵군요.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상징(문학)을 가르치지 말 것, 그것을 절대 시험 문제에 내지 말 것”이라고 앞으로 개정될 몇몇 차 교육과정(교육목표)에 아예 못을 박아두면 어떨까요? 공부 안 하는 게 진짜 공부인 경우는 어디서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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