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 학강미술관장
김진혁 학강미술관장

서울의 열정 미술학도로부터 가끔 전화가 온다. “요즈음 신문의 칼럼을 잘 보고 있습니다.” “가을 날, 한국 초현실주의 미술가이신 대구의 박광호 작가에 대하여 관심을 주시면 합니다.” 그가 힘주어 말한 열정과 관심에 대하여 기초자료를 통하여 적어 보고자 한다.

박광호(1932~2000)작가는 필자와 가깝게 지낸 적은 없지만 몇 번 만나본 적이 있는 관계로 기억을 더듬으며 회상한다. 1998년도 쯤 이다. DAC대구문화예술회관 내에 자리한 미술협회 사무실에서 박광호 교수를 만났다. 그해의 대구미술대전에 초대작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간단한 축하인사와 함께 몇 마디 나누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 “내가 뭐 한 게 없는데, 어떻게 수상자가 되어서. 나 같은 사람에게 상을 다줍니까.” “평생 상이라곤 인연이 없어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는데…” 표정이 굳은 채로 말씀하신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에 대구교육대학 미술과 교수로 정년의 시기에 소외를 피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눈 언 저리가 검게 보이며 얼굴의 혈색이 조금은 아픈 모습으로 다가왔다. 몇 년 후 오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니 아마도 병마가 찾아와 본인도 모르게 굳은 얼굴을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초현실주의 미술로 나아간 박광호 작가

화가 박광호는 대구에서 태어났다. 1951년 당시 6년제인 대구중학교를 졸업하고 6·25동란 중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전역하였다. 이후 부산으로 옮겨온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그림의 기초를 익혔다. 1956년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시에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계성고등학교 미술교사로 1966년까지 10년간 근무하였다. 이 때에 함께 재직한 선배 화가 정점식을 만났고 대구미국문화원을 수시로 드나드는 선배 화가의 영향을 자연스레 흡수하였다. 정점식과 함께한 박광호는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자긍심과 젊은 미술가로서의 변화를 빠르게 모색하며 세계 미술사조로 자연스레 나아간 것으로 생각된다.

1967년에는 초등학교 교사의 양성기관인 대구교육대학교에 전임강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출품작은 34점으로 비정형의 언어를 담은 추상적 초현실풍을 담고 있다. 그의 작업세계에 대하여 선배인 추상화가 장석수는 지역신문에 투고한 글에서 “문학적인 테마로 비구상수법을 가미했다. 작품에 초현실적인 발상 내지 환상에다 현대회화의 다양한 표현요소를 온갖 형태로 충분히 구사한 그런 느낌이다.” 이어서 계성학교에서 함께 재직하다 계명대학교 미술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정점식이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도 초현실주의 계열의 문학적인 환상예술이 프리미티브한 원시미술의 세계가 엿보인다고 서술하였다.

1960년 대 초는 서울의 홍익대 출신 등 젊은 작가들에 의해 앵포르멜 운동이 진행되었고 서구미술사조에 깊숙이 침투하던 시기였다. 대구지역에서도 정점식, 장석수를 위시하여 이복, 서창환, 신석필, 추연근 등의 선배 작가들에 의해 비구상 회화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박광호는 틈틈이 글을 써서 발표했다. ‘폴록과 Shane의 세계’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해프닝이 위치’등 많은 논문 발표와 미술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가 유일하게 참여한 앙가쥬망그룹은 1961년 국립중앙도서관 화랑에서 시작되었다. 앙가쥬망은 지식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말하는 자기실존의 철학적 용어였다. 특정주제를 표현하지 않고 각기 독창적 표현을 구사하는 서울대 동기생이 주축이었다. 박광호는 1967년부터 1990년까지 오랜 기간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학교의 교수생활과 한국적 초현실주의의 자기 세계에 관한 모색으로 중년의 일상을 보내다 세기의 시작인 밀레니엄 시작에 세상을 떴다. 그의 유족들은 선친의 작업을 소중하게 간직하여 대구문화예술회관 기획으로 2012년 유작전을 열었다. 지금도 초현실주의 대가다운 표현이 우리에게 또 다른 울림을 주고 있다. 최근 소식으로는 외국의 저명한 미술관에서 박광호 전시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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