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2006년, 세계적인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이 소유하고 한때 영국 내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주간 신문이었던 ‘뉴스 오브 더 월드(News of the World)’지는 ‘핸드폰 해킹 스캔들’이라는 초대형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신문의 왕실담당 기자였던 클라이브 굿맨(Clive Goodman)이 사립 탐정을 고용하여 윌리엄(William) 왕세손과 그의 개인비서 등 여러 왕실 인사들의 핸드폰 음성 사서함을 해킹하고 음성 메시지를 청취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굿맨과 탐정이 통신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으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의 조직적인 해킹 행위의 피해자들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면서 영국 경찰은 2011년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 정치인들, 연예인들, 운동선수들, 군인 유족들, 2005년 런던 폭탄 테러에 연루된 시민들 등 무려 4,000여 명의 잠재적 피해자들이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2002년에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밀리 다울러(Millie Dowler)라는 소녀의 음성 사서함에 그녀의 부모가 애타게 남긴 메시지를 청취함으로써, 그녀가 생존해있어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수사에 혼선을 빚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국 국민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결국 이 해킹 스캔들을 계기로 이 신문의 편집장을 역임했던 앤디 쿨슨(Andy Coulson) 당시 총리실 공보수석은 해킹 공모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무려 168년의 역사를 자랑한 ‘뉴스 오브 더 월드’는 결국 2011년 7월에 폐간되었다.

영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요람’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언론의 자유를 최우선적 가치로 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영국의 신문들이 위의 사례와 같이 ‘마음 놓고 망나니처럼 날뛸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의 활동에 가장 큰 제약을 가하는 영국의 명예훼손법(libel laws)의 경우 ‘가혹하다(draconian)’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을 정도로 그 내용이 엄격하고 그 처벌수위가 매우 높다. 영국에서 개인이 허위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을 주장하며 언론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낼 경우, 피고인인 언론사는 보도 내용이 진실하다는 입증 책임의 부담을 무조건 져야 하는 반면에 원고인인 개인은 보도 내용이 진실하지 않다는 입증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이에 따라 명예훼손 관련 재판은 입증 책임의 부담을 홀로 지는 언론사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며, 손해배상금의 한도액 또한 정해져 있지 않은 관계로 수십억, 수백억 원의 배상금을 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정도의 징벌적 수준이라면 영국 언론이 몸을 사리고 보도를 함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당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독자나 시청자를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언론이 ‘특종’을 터뜨려야 하는 사실은 엄연하다. 그런데 그 특종과 관련한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릴 경우 거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그 특종을 뒷받침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 때문에 영국 언론이 위의 ‘뉴스 오브 더 월드’ 사례처럼 때때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그 증거를 확보하려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언론의 책임 있는 태도를 종용하기 위하여 세운 사법 체제가 오히려 언론의 무책임한 행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정부는 오보(誤報)에 대한 고의 또는 중과실이 인정되는 경우 언론사가 보도에 따른 손해의 5배 범위 내에서 배상 책임을 지는 상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라는 막강한 위협을 통해 반정부성향 언론을 통제하려는 속셈이 아닐까라는 우려가 물론 앞서지만, 이로 인해 정부가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더욱 큰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운 생각 또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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