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윤정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중·일 합동수색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탄압을 시도했다. 그런데 기대만큼 성과가 없자, 조선군 제19사단을 주축으로 한 대병력을 간도로 침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1920년 8월의 ‘간도지역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 계획’이었다. 그러나 타국인 만주로 명분 없이 군대를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 이에 일제는 ‘훈춘사건’을 조작해 그 구실을 만들어, 간도로 대규모 병력을 출병시켰다.

만주의 한인사회는 5월부터 긴장과 공포에 휩싸였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대응에 나섰다. 만주의 독립군단은 서로 연락을 취하며, 백두산 서쪽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산세가 험하고 높아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8월 하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시작으로, 9월 중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까지 모두 근거지를 옮겼다.

이상룡이 이끌었던 서로군정서는 비교적 손쉽게 출발하였다. 이미 1920년 5월에 만들어진 중·일 합동수색대가 압박해오자, 새로운 기지를 물색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 임무를 띠고 파견된 사람이 헌병대장 성준용과 이상룡의 사위 강남호였다. 이들이 찾아낸 곳 안도현 삼인반(三人班)이었다. 백두산 산림이 뻗쳐있는 울창한 삼림지역인 데다가, 북간도인 화룡현에 접해 있어서 비교적 연계하기도 좋은 곳이었다. 이에 서로군정서는 행정요원과 일부 독립군을 남겨두고 400여 명을 그곳으로 보냈다. 참모부장이었던 일송 김동삼도 북간도에 잠시 머물긴 했지만, 실제 주력군을 이끌었던 인물은 사령관 지청천이었다.

이러한 긴박한 시간 속에서 또 한 사람의 희생자가 나왔다. 바로 안동 출신의 추산(秋山) 권기일(權奇鎰·1886~1920)이다. 권기일은 1912년 3월경 가족들과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성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정착한 뒤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12년 교육회, 1916년 자치단체 부민단(扶民團)에 참여하여 동포들의 안정과 교육에 힘썼다. 1917년 12월에는 자금모집 과정에서 해룡현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듬해 3월 무사히 탈출한 그는 1919년에 이르러 확대 개편된 한족회(韓族會)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20년 8월 중순, 일본 군경의 기습을 받고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동생 권기봉(權奇峰)의 증언에 따르면 “통화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 있다가 학교를 포위한 일군에게 붙잡혀 수수밭으로 끌려가, 총검에 찔려 절명했다.”는 정도이다, 그의 순국과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이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낸 ‘1920년 이후 1921년 2월 16일 사이에 서간도 지방에서 일본 군경에게 사살된 자의 성명 명단’이다. 이 기록에서 순국자 34명 가운데 권기일의 이름이 확인된다. 당시 그의 직책은 ‘교육회 위원과 한족회 구정(區正)’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아내 김성(金姓, 안동김씨 김용묵의 딸, 1885~1958)은 혼자 세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더 이상 만주에 머물 수 없어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혹시나 아들에게 위험이 닥칠까하여 여장(女裝)하여 귀국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후 1933 다시 만주로 간 김성은 시동생과 함께 권기일의 시신을 수습하고 신흥무관하교 뒷산 ‘깨금다리밭’에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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